그런데 염려되는 것은 현재의 정치문화가 조만간 급격히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두고 보면, 희망이야 어떻든 간에 현실적으로는 조심스러운 비관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한국의 정치도 선거를 중심으로 움직여 나가고 있고, 또 통치도 합리적인 일반원칙에 따라 하게끔 형식적인 제도도 웬만큼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표층적인 모습에 불과하다.
▼정치자금 끌어들이기?▼
통치집단은 여전히 의리와 충성이라는 전근대적 규범으로 얽혀서 공과 사의 구별이 모호하여 공직이 소유의식으로 인식되어 경제적 잉여가치는 이들에 의한 수탈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 요직에 대한 충원은 능력보다 권력자의 사적인 신임에 의해 좌우되어 행정의 개인화가 이루어지고, 법은 부조리한 재량권에 의해 유린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반세기에 걸쳐 약간의 개선은 있었지만 여전히 한국정치의 현실을 말해주는 실상들이다.
이는 오랜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지만 사회가 점차 평등화되어가면서 일반적인 현상으로 확대되어 가히 정치문화라고 할 만한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인맥, 학력, 지역 등으로 정치세력이 편성되는 것은 이런 문화의 부수적인 결과들이다.
이런 통치체제가 움직여나가는 데 필수적인 수단은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 돈이라는 ‘실탄’이다. 돈은 이때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모세혈관을 타고 구석구석까지 뻗어나간다.
그런데 체제의 성격상 그 돈은 합법적이고 투명한 방법으로 거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시장을 통해 조달된다.
정치시장은 내밀한 거래를 통해 음성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서 어떠한 공개적인 규칙에도 규제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개되면 범죄가 되고 공개되지 않으면 힘이 된다. 따라서 칼자루를 쥔 쪽에서는 쉽게 숨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칼을 휘두르면 상대는 모두 공포에 떨게 된다.
이러한 관계가 주객을 바꾸어가며 빈번히 재현되면서 정치인들은 모두 부패에 의한 잠정적 범죄인이라는 인식에서 해방되기 어렵게 된다.
그리고 그 여파는 비정치인들에게도 필연적으로 미치게 되므로 웬만한 재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정당원으로 부각되는 것을 한사코 꺼리며 일반시민이라고 할지라도 막연히 보복이 두려워 전화를 통한 여론조사에서조차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를 꺼리게 된다.
이리하여 시민사회라는 것도 상대적으로 취약성을 면치 못하고, 이른바 시민단체들도 정권의 외곽단체로서의 성격을 가질 때에만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정치의 이러한 심층현상을 놓고 본다면, 다가올 대선도 역시 표층적인 명분 싸움에도 불구하고, 누가 가장 큰 돈을 마련하고 뿌릴 것이냐 하는 데 크게 좌우될 것이 틀림없다.
수십년에 걸친 김씨들의 지배로 특별한 카리스마를 가진 예비지도자가 자랄 수 없었던 그간의 사정을 생각하면, 더더욱 돈의 위력이 이전보다 적어질 전망은 별로 없다.
▼‘돈정치’이젠 사라져야▼
그러면 그 필요한 돈을 어디서 지원받을 것이냐는 문제가 나오는데, 이것이 모두에게 실로 궁금하다. 밝혀진 바가 없어 무어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후보들이 벌써부터 김씨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경쟁하는 것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가는 일이다.
말하자면 인기 없는 전 현직 대통령들이라 할지라도 정치판에서 아직 목소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시민들이 알지 못하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보면 거의 틀림없다.
역사의 진행이란 꼬부랑길을 걷는 것이어서, 이러한 한국의 정치문화가 이번에도 당장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런 가운데 앞으로도 무수한 정치 사상자들이 나올 것이지만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대가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런 정치문화가 하루빨리 개선되지 않고는 산업사회인 한국사회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합리성과 투명성이 확보될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객관적 조건과 현실 간의 모순이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되는 절박한 시점에 우리는 놓여 있다.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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