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된 배후에는 당의 형성이 크게 지역성과 김씨들과의 친소관계에 따라 이뤄진 것에 기인한다. 그러다 보니 노선이라는 요소는 희석되고 좌우가 동거하는 혼숙 정당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각 당 내부의 후보들이 벌이고 있는 논쟁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도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어느 정당이 대선에서 승리하든지 정당들의 모습이 이 모양으로 지속된다면, 국정의 혼란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노선 없이 좌우동거▼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노선에 따라 정당들이 새로 구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하나의 이유가 발견된다. 정치세력이 보혁으로 가름되어야 한다는 추상적 논의와 주장은 항간에 자주 발견된다. 그러나 문제는 진보 혹은 좌파세력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반대세력에 대해 우파니 보수니 하고 이름 붙여 공격하면서도 막상 스스로가 좌파라고 지목받으면 아니라고 부인하는 기이한 현상이다.
주적(主敵)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 얼버무린다든지 북한 주민의 인권이나 체제의 민주화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것이 진보로 치부되는 한국적 착도 현상이 걸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는 분명 민주화된 정치사회에서 정치세력이 취할 태도는 아니다. 그것은 국민들의 정권 선택의 조건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애당초 이렇게 분명하게 자기 모습 드러내기를 꺼리게 만든 진원지는 지금의 정권이며 그 정권에 책임이 있다. 기회주의적 정권 운영이 이 정부의 두드러진 특색인데, 그것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북한문제에 접근해온 정책에 대해서는 함구하면서 사회보장 정책만을 들고 나와 반박하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다. 떳떳하게 좌파라고 시인하면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윽박지르는 야당 또한 그 모습이 여간 희한하지 않다. 우파를 자처하면서도 노선에 관련된 어느 문제 하나 제대로 짚고 넘어가는 것이 없다. 정치적으로 불신임을 당한 사람이 청와대에 다시 들어가고, 그 사람이 다시 북에 특사로 가는 것에 대해 정치적 책임 하나 따지지 않는 것이 야당의 모습이다. 이런 사정으로 보아 이번 대선까지는 혼숙 정당이 그대로 존속될 것으로 보이며, 국민은 안개 속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이런 사정은 지금 김대중 정권의 정권 재창출 노력에 절호의 조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혼숙이라는 안개 속이라야 권력장치를 장악하고 있는, 이른바 진보세력이 힘을 발휘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것이다.
그 목표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엄중한’ 궁지에 몰린 북한정권의 연명을 보장해 줌으로써 햇볕정책의 명맥을 유지시키는 것이고, 둘은 대통령의 아들들 문제를 어떻게 하든 돌파한다는 것이다. 이런 목표를 전제로 고려해보면, 지역갈등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상위개념인 민족을 내세워 대통령 자신이 정계의 헤쳐 모임을 시도해 혼숙정당 현상을 청소한 뒤 개인적 충성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가독(家督)정당 구성을 시도할 가능성이 없지 않아 보인다. 그것은 저간의 경험으로 보아 지금과 같은 어려운 사정을 두고 김대중 대통령이 그냥 넘어갈 위인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DJ 신당 창당 가능성▼
그러나 당장의 사정은 매우 심각하다. 최고권력자의 아들문제로 시끄러운 외국의 사례들을 접하면서, 어느 후진국의 일인가 하고 남의 집 불 보듯 하던 일이 우리 사회에도 연거푸 현실문제로 등장한 것을 본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가 서구식 민주주의는 동양에는 맞지 않다고 한 주장을 반박하던 김 대통령의 과거 모습이 왜 이리도 슬프게 느껴지는지, 그 참담한 심정을 금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이 나라 백성의 고통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을 왕에 비교하게 되고, 아들들을 왕세자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우리는 지금 역사적으로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묻게 된다. 북의 김일성 왕조를 비웃던 우리들이기에 말이다.
역사는 이렇게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진행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한 가지 걸 수 있는 희망은 국민이 현명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실로 ‘엄중한’ 것이다.
■지난해 4월19일부터 1년 기한으로 연재돼 온 ‘노재봉 칼럼’이 오늘자로 끝납니다.
노재봉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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