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가 적기 때문에 대권후보들의 연설회는 우리의 면 단위 유세를 연상케 한다. 유권자보다 오히려 보도진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북새통을 이룬다. 대권의 행운을 잡는다는 생각으로 사무실 하나 없이 맨몸으로 뛰어든 주자들도 보통 60∼70명은 된다.
대권 지망자들이 이처럼 첫 예비선거가 실시되는 뉴햄프셔주로 몰리는 까닭은 ‘좋은 점수’만 얻으면 언론의 집중보도로 전국적인 명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후원금과 지지자가 뒤따른다. 전국적인 지명도가 낮았던 민주당의 지미 카터(76년),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80년) 민주당의 빌 클린턴 후보(92년)는 모두 뉴햄프셔주의 예비선거를 발판으로 백악관 입성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돈-조작선거 후유증 우려▼
미국의 예비선거는 정당의 간부나 파벌의 대표가 ‘밀실’에 모여 후보를 결정하는 데 대한 평당원들의 반발과 항명으로 생겨난 제도다. 처음 예비선거를 실시한 곳은 1904년 플로리다주이며 뉴햄프셔주는 1952년부터다. 그러나 예비선거제가 전국적으로 자리잡은 것은 민주당이 획기적인 확대 방안을 마련한 1968년 이후다. 생각보다는 상당히 우여곡절을 겪었다.
최근에는 이 제도의 단점도 많이 지적되고 있다. 대부분의 주들이 후보선택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점점 선거일을 앞당기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슈퍼 화요일’선거가 바로 그것이다. 작년 3월7일 실시된 ‘슈퍼 화요일’ 선거에는 남부와 동북부의 11개 주가 참가했다. 이처럼 각 당 대권주자들의 판세가 초반에 드러남에 따라 7, 8월 전당대회까지 약 6개월 동안 국민의 다양한 검증을 받게 한다는 당초 예비선거의 목적도 희석되고 있다.
또 대통령후보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유권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특정 세력이나 계층에 의해 선출되도록 한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대부분 핵심당원이거나 이념적으로 열성을 가진 사람들만 예비선거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당원이나 일반유권자들이 후보선출과정에 광범위하게 참여할 수 있다는 점, 유능한 정치 신인을 등장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평가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보완이 필요한 제도인 것이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총재직에서 물러난 민주당도 국민참여 경선제라는 예비선거제를 도입할 모양이다. 1인보스체제, 밀실정치, 체육관선거 등 온갖 구태를 생각하면 예비선거제는 우리에게 바람직한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을 생각해 봐야 한다. 좁은 나라에서 몇 달씩 예비선거를 실시하다 보면 지역간의 대립이나 돈선거 조작선거 등 후유증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당의 대의원이 참석하는 행사도 난장판이 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일반 유권자까지 참여하는 대권주자들의 유세가 전국에 걸쳐 순차적으로 계속된다면 정치판 분위기가 어떻게 되겠는가. 선거만 하다 망한다는 얘기가 곳곳에서 나올 게 뻔하다.
▼시간두고 진지한 준비를▼
더구나 민주당측의 의도도 우리가 보기에는 순수하지 못하다. 정치의 백년대계(百年大計)보다는 우선 살고 보자는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추진하는 인상이 짙다.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대권 주자들이 졸속으로 마련해 구멍이 여기저기 뚫린 그런 경선 규칙을 신사적으로 지키려 하겠는가.
미국식 예비선거로 유권자가 직접 대선후보를 선출한다고 하면 겉보기에는 정말 그럴듯한 그림이다. 당장은 정치판을 외면하고 있는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정치문화가 우리보다 훨씬 앞선 미국도 예비선거제를 뿌리내리는 데 60여년이 걸렸다. 그런 제도를 몇 달 안에 만들어 실시한다면 그 부작용과 후유증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질 건가.
민주당은 좀 더 진지한 자세로 정치발전을 위한 예비선거를 생각해야 한다. 오직 내년 대선만을 의식해 졸속으로 만든 예비선거 카드를 꺼낸다면 그것은 국민을 현혹시키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남찬순<논설위원>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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