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남찬순]검은돈의 ‘출구’

  • 입력 2002년 1월 14일 18시 26분


우리 정치사에 가장 노골적이고도 치졸한 방법으로 정치자금을 마련한 정치권력은 5·16군사쿠데타 주도 세력일 것이다. 이들은 60년대 초 주가조작과 워커힐 건설, 일제 승용차와 빠찡꼬 불법 반입이라는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을 통해 ‘검은돈’을 마련하고 그 돈으로 민주공화당과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그 후에도 차관을 도입하거나 새로운 무기를 구입할 때는 예외 없이 상당한 액수가 정치자금으로 떨어져 나갔다. 74년부터 시작된 율곡사업(군 전력증강사업)은 20여년 동안 집권세력의 만만찮은 ‘수입원’이었다. 특혜를 받은 재벌이 정권의 ‘뒷돈’을 대 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벌써 ‘돈 잔치 선거’ 조짐▼

그런 돈이 선거철만 되면 수억원씩 뭉칫돈으로 유권자에게 뿌려졌다. 어떤 대통령은 그 돈을 통치자금이라며 집안 장롱 속에 보관하고 있다가 적발됐고 아예 그런 돈은 만지지 않겠다고 한 대통령도 나중에 알고 보니 아랫사람들이 대신 신나게 ‘돈 잔치’를 벌였다. 정치자금에는 항상 부정과 비리의 독버섯이 피어 있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14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올해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가 역사상 가장 공정한 선거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가 똑 같겠지만 벌써부터 ‘검은돈’이 선거판을 좌우할 조짐이 보인다.

올해 선거에 동원할 수 있는 각 정당의 공식 가용자금만 대충 계산해 보자.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은 모두 1138억원이다. 여기에 정당이나 정치인의 후원회를 통해 들어오는 수입이 있고 당비와 차입금, 당 자체의 사업수입금, 기탁금과 기부금 그리고 개인적인 재력 등이 추가될 것이다. 그러나 올해 정치권의 지출 내용을 따져보면 그 같은 수입으로는 계산이 맞지 않는다. 4대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 그리고 재·보궐선거에 들어갈 돈만 해도 수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게 언론의 추산이다. 정치권은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지금은 ‘검은돈’을 감시하고 지키는 눈이 많아졌다. 재벌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렇다고 정치인이 정주영 전 현대명예회장처럼 모두 재벌은 아니다. 끊임없이 ‘검은돈’의 광맥을 개발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어딘가 여전히 ‘검은돈’의 원천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최근의 각종 게이트 사건도 ‘검은돈’과의 연관 의혹 때문에 더욱 주시를 받고 있다. 실제로 재작년 4·13총선 당시를 되돌아보는 사람들이 많다. 수조원에 이르는 선거자금 중 상당한 액수가 벤처 주식이 춤을 추면서 흘러나온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이제 벤처도 더 이상 이용하기 어려우니 정치권 골방에서는 또 다른 신종 수법이 모색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선거 방법을 바꾸면 ‘검은돈’의 규모는 상당히 축소될 것이다. 선거자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동원과 세몰이 조직관리 비용은 선거공영제가 실시되면 크게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풍토는 아직 선거공영제를 실시할 만한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유권자에게 은밀히 건네는 돈이 바로 ‘실탄’이요, ‘즉효약’이라는 믿음은 전혀 바뀌지 않고 있는 데다 유권자의 의식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그렇다면 정치자금이 정치권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그 돈이 정치권 밖으로 나오는 ‘출구’를 지켜 ‘검은돈’의 흐름을 차단하는 길밖에 없다. 미국은 정치자금의 ‘입구’쪽 감시가 철저하고 영국은 ‘출구’쪽 감시가 엄한 나라다.

‘입구’쪽 감시를 강화하려면 ‘검은돈’이 정치권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엄격한 법적 제도적 규제장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은 너무나 은밀하고 교묘하게 ‘검은돈’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입구’쪽 감시는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도 최근에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측 인사들과 엔론이라는 대기업간의 정치자금 거래문제가 쟁점화되고 있다. 더구나 우리의 정치권은 그런 규제장치조차 마련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국회에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있지만 개점 휴업상태다.

▼유권자 감시의 눈 부릅떠야▼

당장 좀 손쉬운 방법은 ‘검은돈’이 들어오는 ‘입구’보다 ‘출구’쪽 감시를 강화하는 일일 것이다. 정치자금의 ‘출구’는 대부분 유권자 쪽으로 향해 있어 ‘검은돈’의 현장이 쉽게 잡힐 수 있다. 선거운동과 관련된 고소 고발이나 내부자 폭로를 보호 장려하는 법적 사회적 장치가 더욱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선거자금 모으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검은돈’ ‘부패한 돈’이 어느 때보다 우리 사회를 흥건히 적실 가능성이 큰 해다. 밤을 새워서라도 ‘출구’감시를 해야할 때가 오고 있다.

남찬순 논설위원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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