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진정한 인디 문화가 그립다

  • 입력 2005년 8월 5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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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는 무명 시절에 독일 함부르크의 싸구려 술집을 떠돌면서 공연한 적이 있다. 그 술집들은 요즘도 ‘비틀스가 연주했던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함부르크에서 하루 8시간씩 무대에 올라야 했던 비틀스 멤버들은 이곳에서의 맹훈련이 훗날 성공의 원동력이 됐다고 회고했다.

생방송 중에 알몸을 드러낸 초유의 일이 발생하면서 ‘인디 밴드’라는 말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사고를 일으킨 ‘카우치’는 홍익대 앞에서 활동하는 500여 개 인디 밴드 중 하나다. ‘인디’는 영어 인디펜던트(독립)에서 나온 말이다. 상업성과 자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해 보겠다는 집단이다. 비틀스가 함부르크에서 성장해 ‘20세기의 전설’이 되었듯이 국내 인디 밴드 중에도 실력을 쌓아 정상에 도전하겠다는 그룹이 많다. 이들의 무대인 음악 클럽들은 예술적 가능성을 타진하는 실험공간이다.

따지고 보면 문화계 어디에나 ‘인디’가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대학 시절처럼 전위영화를 만드는 젊은 영화인들도 ‘인디’이고, 대학로의 지하 공간에서 소극장 연극에 몰두하는 연극인도 같은 부류에 속한다. 가난을 각오하고 묵묵히 화가의 길을 걷는 미술인들이나, 혼탁한 정신세계를 시와 소설로 정화하겠다는 문인들도 ‘인디 문화’의 한 축을 형성한다.

그래서 인디 문화는 문화계에 젊은 피이자 뿌리 같은 존재다. 이들은 문화의 획일화를 거부하고 다양성을 추구한다. 인디 문화가 풍요로워야 한류와 같은 문화 산업도 계속 활성화될 수 있는 것이다.

알몸 노출 사고를 친 ‘카우치’ 멤버들이 계획적으로 옷을 벗기로 했던 것으로 경찰 조사 결과 드러났다. 사고 직후 ‘생방송인 줄 몰랐다’고 발뺌하더니 ‘사전 모의’ 의혹이 불거지자 ‘그런 적 없다’며 펄쩍 뛴 것도 ‘사전 모의’만큼이나 부끄러운 일이다. 이들의 행동은 치졸하고 분별없는 것이었지만 정작 관심은 우리의 인디 문화가 얼마나 건강한가에 쏠린다.

MBC ‘음악캠프’가 이들을 출연시킨 것은 실력 있는 인디 밴드를 지상파 방송으로 소개하는 차원이었다고 한다. 상업성과 거대 자본을 거부한다는 인디 밴드들이 주류 미디어의 제의에 주저 없이 응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더 큰 잘못은 모처럼 생방송을 탈 기회가 왔으니 대형 사고를 쳐서 대중의 눈길을 끌어 보자는 발상이다. 이들은 알몸 노출을 ‘퍼포먼스’니 ‘행위예술’이니 하는 말로 포장했지만 ‘사이비 인디’임을 자백하는 것이다. 음악적 순수성을 생명으로 하는 ‘인디 정신’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러지 않아도 우리의 인디 문화는 상업주의 공세에 휘청거리고 있다. 한국의 ‘오프 브로드웨이’라던 대학로는 술집 가득 찬 유흥가로 변한 지 오래고, 문인 화가 무용가처럼 가난한 순수 예술인들은 생존의 기로에서 하나 둘 정든 둥지를 떠나고 있다. 그들을 만나 보면 ‘순수 예술’ 대신 ‘기초 예술’이란 말로 바꿔 불러 달라고 신신당부한다. 순수 예술이 문화의 기초라는 사실을 제발 알아 달라는 애절한 호소다.

‘카우치’ 사태가 빈사 상태의 인디 문화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빚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전부터 홍익대 앞 인디 밴드를 퇴폐나 타락의 이미지로 바라보는 시선이 적지 않았던 터다. 예술가에 대한 편견은 아직도 남아 있다.

인디 문화가 이 땅에서 아주 사라져 버린다면 오히려 우리는 상업과 퇴폐 문화의 홍수 속으로 내몰릴 것이다. 시야 밖에서 그동안 우리의 눈에 잘 띄지는 않았지만 뚜벅뚜벅 예술가 정신을 추구해 온 진짜 인디에게는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들 속에 한국의 비틀스, 스필버그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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