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방형남 칼럼]천출(天出)과 천출(賤出)

  • 입력 2004년 4월 7일 19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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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금강산 이산가족상봉 행사에서 통일부 소속 사무관이 무심결에 한 발언으로 소동이 벌어졌다. 거창하게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초보적인 한자 상식만 있는 사람이라면 웃어넘길 수도 있는 농담이었는데 왜 그렇게 큰 사건이 됐을까. 북한 주민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천출(天出) 명장’으로 받드는 게 현실이라 해도 ‘천출(賤出)’ 또한 같은 발음이 분명한데 왜 우리 정부와 대표단은 ‘말실수’로 처리하지 못하고 북한의 항의에 쩔쩔매야 했을까.

이대로 넘어갈 일이 아니다. 거기에 남북관계의 현주소가 축약돼 있기 때문이다.

▼호통치는 北, 쩔쩔매는 南 ▼

소동은 상봉 행사를 볼모로 삼은 북측의 공세에 밀려 남측이 손을 드는 것으로 끝났다. 남측은 “우리측 지원인원이 물의를 야기한 데 대해 사과의 뜻을 표한다.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유의하겠다”는 요지의 사과문을 북측에 전달했다. 문제의 발언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재발방지 약속까지 한 셈이다.

국가간에 오가는 사과의 의미는 무겁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북한이 우리에게 얼마나 어렵게, 마지못해 잘못을 인정했는지를 돌이켜보면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

북한은 2002년 6월 29일 발생한 서해교전과 관련해 “우발적으로 발생한 무력충돌 사건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교전 후 거의 한달이 지나서였다. 유감은 정부가 요구한 사과에 못 미치는 것이다. 게다가 북한은 “북남(남북) 쌍방은 앞으로 이러한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간주한다”고 토를 달았다. 싸움은 북의 도발로 벌어졌는데 남북이 함께 재발을 막아야 한다는 교묘한 논리를 동원했다.

서해교전은 북한의 공격으로 우리 해군 5명이 숨지고 19명이 다친 ‘전쟁’이었다. 금강산 사건은 비록 북한 지도자가 관련됐다 해도 농담 또는 단순한 말실수에 불과하다. 사건의 경중을 따진다면 북한은 깊이 사과하고 남한은 가볍게 유감을 표시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결과는 북한은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우리는 맥없이 굴복한 꼴이 됐다. 남북관계에 비정상적인 관례가 쌓이는 것은 좋은 조짐이 아니다. 그럴수록 북한이 우리를 만만한 상대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2월 남북장관급 회담을 돌아보자. 당시 가장 눈에 띄는 합의가 남북군사회담 개최였다. 그런데 합의 내용이 이상했다. 남측은 ‘군사당국자회담을 조속히 개최하기로 하였다’고 했으나 북측은 ‘조속한 개최를 각기 군사당국에 건의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논란이 일자 정세현 통일부 장관은 “여러 협의 끝에 각자 낭독한 문안의 효력을 인정하는 것으로 합의했기 때문에 문제없는 것으로 봐도 된다”고 해명했다.

▼건의는 합의가 아니었다 ▼

그러나 결과는 정 장관의 말과 다르다. 장관급 회담 5일 뒤 정부는 ‘남북간에 합의한 장성급 회담을 2월 23일 판문점에서 갖자’고 북측에 공식 제의했다. 하지만 북은 일언반구 반응이 없었다. 국방부가 나서서 두 차례 더 회담에 응할 것을 촉구했으나 북한은 지금까지 철저히 묵살하고 있다.

이것이 통일부가 말하는 ‘남북 합의’의 실상이다. 북한 주민에게 쌀과 비료를 지원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남북교류의 진전에 불안을 느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국민은 현실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북한에 끌려가거나 비굴하게 처신하는 대북정책을 지지하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변해야 할 대상은 우리가 아니고 북한이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북한이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가능한 한 포용하려다 엉뚱하게 우리가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원칙도, 자존심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부가 앞장서서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닌지 뜯어볼 때가 왔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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