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방형남 칼럼]고속철과 새 정치

  • 입력 2004년 4월 21일 18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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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전 고속철(KTX)이 개통됐지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고속철의 나라 프랑스가 자랑하는 테제베(TGV)를, 그것도 오래전에 숱하게 타 봤기 때문이다. 해저터널을 거쳐 파리와 런던을 오가는 유로스타는 물론 객실이 2층으로 된 뒤플렉스(Duplex) TGV까지 이용했던 필자에게 KTX는 신기한 탈것이 못 된다.

81년에 달리기 시작한 1세대 TGV가 428km인 파리∼리옹을 두 시간에 주파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 23년이 지나 서울∼부산 400km 거리를 2시간40분에 달리는 KTX를 ‘꿈의 열차’로 여기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주문이다. 시속 200km 이상으로 달리는 열차를 고속철이라고 한다. 예정대로 2010년 서울∼부산 전 구간에 신선(新線)이 깔려 운행시간이 1시간56분으로 단축된다면 모를까. KTX는 아직은 초보 고속철이다.

▼대한민국號 이제는 달리려나▼

그렇다고 KTX의 고장과 운행지연을 불안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시행착오와 적응기간이 불가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KTX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온 프랑스 국영철도공사(SNCF)의 루이 갈루아 총재는 “높은 정시 운행률에 놀랐다”며 “그러나 3∼6개월의 적응기가 필요한 만큼 앞으로 장애가 많이 발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2001년 6월 개통된 프랑스 지중해선의 경우 첫 1개월 정시 운행률이 75%에 불과했고 6개월이 지나서야 90%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번 총선 결과를 고속철 개통에 비유하면 어떨까.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과반의석을 준 유권자들은 ‘대한민국호(號)’가 속력을 내 달리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무능 부패정당들이 이끈 정치를 저속철이라 한다면 승자인 열린우리당이 추구하겠다는 정치는 고속철 수준이다.

‘약체 정부여서’, ‘거대 야당이 발목을 잡아서’ 등등의 이유를 대며 징징거리는 정부 여당을 보다 못해 국민이 힘을 실어줬다. ‘분점정부여서 어렵다’는 호소에 통합정부를 선물했다. 승자는 기뻐하기 전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이래도 제대로 달리지 못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된다.

열린우리당의 결의를 일단 믿어보고 싶다. 정동영 의장은 당선자대회에서 “국민은 광복 후 최초로 민주 개혁세력을 현실 역사의 중심에 서도록 만들어줬고 4·19선배들이 이루지 못한 꿈과 한을 우리당을 통해 이룰 것을 명령하고 있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은 정치개혁을 하겠다며 ‘일하는 국회 준비위원회’와 ‘새정치실천위원회’를 구성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도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국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당선자들에게 주문했다. 바야흐로 정당의 ‘환골탈태 경쟁’이다.

고속철의 조속한 정착을 다그치지 않듯이 정치판의 변화 또한 느긋하게 기다려 보려고 한다. 선거에서 승리한 뒤 정치를 바로잡겠다고 약속하지 않은 정당과 정치인이 없었다는 사실도 잠시 접어두자. 고속철이 그렇듯 새로운 정치도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와 적응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소나무도 잣나무도 무성해야▼

고속철만 잘 된다고 철도사업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느리지만 요소요소에 정차하고 요금이 저렴한 저속철도 함께 발전해야 한다. 한 정당의 목소리가 정치판을 휘둘러서도 안 된다. 과거에 들리지 않던 주장이 제도권에 들어왔다고 해서 지금까지 듣던 목소리를 모조리 묵살하는 것을 발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철도도 정치도 상생(相生)이 필요하다. 송무백열(松茂栢悅)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한 가지 덧붙일 경구(警句)가 있다. 고속철 사고는 일단 발생하면 대형사고다. 여대야소 정부가 잘못할 경우 국민이 치러야 할 대가도 마찬가지다. 어느 곳에서든 “차라리 저속철 시대가 좋았다”는 탄식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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