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방형남 칼럼]분노를 사랑으로

연말 밤거리를 밝히는 조명이 아름답습니다. 특히 이탈리아 조명 기술로 장식된 세종로 일대는, 프랑스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자랑하는 파리의 샹젤리제에 못지않게 휘황찬란합니다. 밤마다 몰려들어 야경을 즐기는 시민들이 동화 속 아이들처럼 행복해 보입니다.

찬바람이 부는 거리에서 오색 전등의 물결에 파묻히는 기분은 어떨까요. 잠시 걸어보니 한 해를 보내는 스산한 마음을 잊기에 충분한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비록 인공이지만 어둠을 물리치고 마음을 포근하게 해 주는 불빛의 힘입니다.

▼어둠 쫓고 추한 것 덮고▼

하긴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불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입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태양에서 불을 따다 인간에게 주었답니다. 신화의 저자는 불을 얻게 된 인간들의 기쁨보다 생전 처음 불을 본 요정들의 수난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너울너울 춤을 추는 불의 모습에 반한 요정들이 끌어안고 입을 맞추려다 혼이 났다는 겁니다.

추위를 이기고 먹을 것을 익히는 데 쓰이던 불이 전깃불로 발전해 거리의 어둠을 몰아내고 행인들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하니 신의 선물로 믿어도 좋을 듯합니다.

연말에 눈이 오기를 고대하는 사람들도 거리를 밝힌 불빛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심정일 것입니다. 불이 어둠을 물리치듯 눈은 더럽고 추한 것들을 덮습니다. 그러나 불 밝힌 거리를 찾아가고 눈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잠시 어둠이 가시고 추한 것이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하지는 않겠지요. 새해에는 불행이 끝나고 행복이 넘치기를 기원하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에 어둠이 줄어들고 더러운 것들이 없어지기를 소망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저는 얼마 전 초등학교 시절 친구 덕분에 어둠을 쫓고 추한 것을 덮는 듯한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한 친구가 동네 노인의 팔순잔치에 모인 친구들에게 기특한 제안을 했답니다. “내가 배추와 무를 내놓을 테니 여럿이 모여 좋은 일 한번 해보자. 김치를 담가 불우한 사람들에게 보내면 어떨까.” 몇몇 친구들이 좋다며 추진하자고 했답니다.

며칠 뒤 아이디어를 낸 친구 집에 여섯 명의 남녀 친구들이 모였습니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 고향에서 농협조합장을 하는 친구, 동네 이장을 하는 친구가 달려와 제법 구색이 갖춰졌다고 합니다. 모두 소매를 걷어붙이고 밭으로 달려가 배추를 다듬어 집으로 옮긴 뒤 하루 종일 김장을 했답니다. 500여 포기의 김치를 담그느라 다음날까지 일을 해야 했습니다. 둘째 날에는 남자 친구들의 부인들이 가세했습니다.

김치 배달도 친구들이 직접 했답니다. 대상은 시청과 면사무소의 도움으로 골랐습니다. 먼저 이십여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장애 어린이 보호기관에 200포기를 전달했습니다. 면 경계를 벗어난 ‘원정 선행’이었지요. 이어 고향의 24개 마을을 찾아다니며 독거노인과 불우이웃에게 나머지 김치를 전했답니다.

▼작지만 따뜻한 마음 모이면▼

올해는 무 배추 값이 폭락해 밭을 갈아엎는 농부들이 많았습니다. 정부의 농정 실패에 대한 분노, 힘들게 농사를 지어봐야 본전도 찾지 못하는 한심한 현실에 대한 불만이 그런 행동으로 나타났겠지요. 오죽하면 그랬을까요.

화가 나서 갈아엎을 수도 있는 무 배추를 좋은 곳에 쓴 친구가 그래서 특별해 보입니다. 농사꾼 친구는 “별것 아닌데…”라며 말을 아꼈습니다. 그래도 자꾸 캐물으니 언뜻언뜻 농민의 분노를 내비치더군요. 밤늦게까지 김치 배달을 한 친구는 “고향에 불우한 이웃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며 “내년에는 친구들을 몽땅 모아 본격적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분노를 사랑으로 바꾼 친구들이 대견합니다.

올해가 이틀 남았습니다. 모두 좋은 생각으로 한 해를 마무리했으면 합니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