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이틀 전 미국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한국의 평화경제론’이라는 주제로 연설하며 남북관계를 밝게 묘사했다. 그는 올해 남북 교류협력의 급성장은 과거 서독의 대(對)동독정책과 마찬가지로 ‘접촉을 통한 변화’를 추구하는 현 정부의 정책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파워포인트까지 동원해 개성공단의 과거와 현재, 금강산 근처 해변 관광,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 개설 장면 등을 외국 기자들에게 보여 줬다.
정 장관은 2020년까지 한반도 경제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한 방안으로 북핵 문제 해결과 상호 협력, 호혜사업을 병행 추진하는 ‘평화경제론’을 제시하며 개성공단이 평화경제론의 상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에게도 “개성공단이 성공하면 북한이 경제 성공을 통해 변하게 하는 씨앗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장관이 희망을 얘기하고 있을 때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대결의 나팔을 불었다. 이 통신은 미국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기는 했으나 핵심은 비관적인 한반도 인식이었다. “핵 활동 강화하겠다, 금융제재 철회하라, 우라늄 농축설은 날조다, 경수로 손실 보상하라….” 황우석 교수 파동 등으로 어수선해서 언론이 크게 다루지 않고, 정부는 초연한 척하지만 ‘파장(罷場) 선언’ 수준의 협박이다. 어느 대목에서도 현재의 난국이 잘 풀릴 것이라는 희망을 찾을 수 없지 않은가.
정 장관과 북한의 진단이 왜 이렇게 다를까. 북한은 동쪽의 신포 경수로를 바라보고 있는데 정 장관은 서쪽의 개성공단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착시(錯視)인지 약시(弱視)인지, 누군가는 엉뚱한 곳을 보고 있다.
정부의 버티기 전략에도 불구하고 경수로는 지난달 사망 판정을 받았다. 중단(suspension)이라는 고육책을 만들어 억지로 2년여를 연명하게 한 환자에게서 산소마스크를 떼고 종료(termination) 선언을 한 것이다.
1997년 8월 대지 정지 공사 착공 이후 8년을 넘긴 경수로 사업의 후유증이 없을 리 없다. 수백만 평의 땅을 깎고 파서 원자력 발전소를 짓는다고 난리를 치더니 흉물스러운 미완성 콘크리트 더미를 남긴 채 손을 떼겠다는 ‘외세’를 고이 보낼 북한이 아니다. 조선중앙통신은 “직간접적으로 수백억 달러의 물질적 손실을 입었다”며 “손실에 대해 마지막 한 푼까지 보상을 받아 낼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 장관도 국회에서 “경수로 청산 비용을 1억5000만∼2억 달러로 잠정 추계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경수로 사업은 한국과 미국 일본 유럽연합(EU)이 개입한 다자(多者) 프로젝트인데도 깨졌다. 우리가 부담한 11억3500만 달러를 포함해 근 15억 달러가 들었지만 파국을 막지 못했다.
반면 개성공단은 가동 1년을 겨우 넘긴 초보 사업이다. 정 장관은 장밋빛 미래를 말하지만 이미 현장에서는 점점 어려워질 노동력 조달, 낮은 생산성 등 문제점들이 부상하고 있다. 개성공단은 남한과 북한의 양자(兩者) 프로젝트여서 북한이 이 나라 저 나라 눈치를 살필 이유도 없다. 과도한 희망을 걸기보다는 돌다리를 두드리는 자세로 접근하는 게 상식이다.
경수로가 위기를 맞을 때마다 정부 관계자 사이에서는 “청문회가 다가오고 있다”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이 나돌았다. 경수로를 외면하고 개성공단을 띄운다고 책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랑하고 싶은 것만 자랑하면 결코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방형남 편집국 부국장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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