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안타깝게 보낸 6·25 6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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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2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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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존 덩컨 교수가 겪은 6·25전쟁의 고통은 여느 한국인보다 깊고 크다. 한국인과 결혼한 그는 장인을 ‘외로운 분(lonely man)’이라고 회상한다. 그의 장인은 전쟁이 터지자 아내와 남동생만 데리고 황급히 남한으로 피란 온 이산가족이다. 잠시 내려와 있으면 곧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오판이었다. 장인은 단 하루도 북한에 두고 온 혈육을 잊지 못했다. 장모는 말끝마다 “다 아오지 탄광에 끌려갔겠지”라며 안타까워했다.

미국인 교수의 외로운 장인

1994년부터 평양의 가족과 기적처럼 편지 상봉이 시작됐다. 가족들이 살아남았고 아오지 탄광에도 끌려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장인은 혈육을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각종 선물을 한 트럭도 넘게 북한으로 보냈다. 돈도 수십 차례 보냈다. 그러나 장인은 끝내 혈육을 만나지 못했다. 북한 당국은 이산가족의 한(恨)을 단물을 빨아먹는 수단으로 이용하며 장인을 괴롭혔다.

지난달 24, 25일 남캘리포니아대(USC)에서 열린 ‘한국전쟁이 남긴 유산과 교훈’ 주제의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한 덩컨 교수는 6·25전쟁 60주년의 의미를 자신의 가족사로 정리했다. 그의 장인은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올해 90세인 장모도 혈육 상봉의 꿈을 접었다. 덩컨은 자신의 장인 장모처럼 수많은 한국인에게 남겨진 6·25의 고통과 슬픔을 해소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역설했다. 무엇보다 비인간적인 전쟁의 유산을 치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덩컨은 한국의 처절한 민주화 과정도 체험했다. 1960년대 말 미군 병사로 한국에서 복무한 그는 제대 후 고려대에 입학해 한국사를 공부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대학에 군이 진주한 어느 날 김모 교수가 특별한 부탁을 했다. 교수실에 있는 ‘민주화 선언문’을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김 교수는 “군인들이 선언문을 발견하게 되면 나와 서명 교수들이 모두 체포될 것”이라며 “미국인인 자네는 학교 출입이 가능할 것 같아 부탁한다”고 했다. 겁이 났지만 정문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교실에 책을 두고 왔다고 둘러대고 학교로 들어갔다. 교수실에서 선언문을 발견한 그는 한동안 망설였다. 문건을 들고 나오고 싶었지만 몸수색에 걸리면 김 교수도, 서명한 다른 교수들도, 자신도 고초를 겪을 것이 뻔했다. 고민 끝에 선언문을 불태우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는 1972년 고려대를 졸업했다. 한국 유학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가 역사학 교수로 강단에 서면서 현재 UCLA 한국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한국을 속속들이 아는 그이기에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이 된 아내의 나라, 독재의 굴레를 벗고 민주화를 이룩한 장인의 나라가 자랑스럽다. 그렇지만 6·25는 아직도 그에게 고통과 슬픔으로 남아있다.

6·25의 클라이맥스는 평화통일

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이 공동 주최한 이번 심포지엄에 존 틸럴리 전 한미연합사령관도 참석했다. 필자가 16개 참전국 방문 시리즈를 비롯한 동아일보의 6·25 관련 보도에 대해 소개하자 그는 “6·25의 클라이맥스는 반드시 한국의 평화적 통일이 돼야 한다”는 신념을 피력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국내외에서 각종 행사가 이어졌다. 참전국과 참전용사들에게도 골고루 감사를 전했다. 외형적으로는 풍성해 보인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6·25는 일시적 행사와 짧은 감사로 그칠 날이 아니다. 덩컨처럼 절절히 6·25의 상처를 기억하며 치유법을 역설하고 틸럴리처럼 확신을 가진 외국인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6·25는 다시는 전쟁의 피해자가 되지 않겠다는 각오로 통일을 준비하는 날이 돼야 한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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