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찾아간 백령도는 아직 봄 세상이었다. 육지의 아카시아는 이미 꽃을 피웠지만 백령도 아카시아는 막 여린 연초록 잎을 내밀기 시작했다. 기온도 육지보다 낮아 맑은 날씨에도 해풍이 쾌적했다. 1년 전 천안함 폭침사건만 없었다면, 우리나라에서 8번째로 큰 섬의 늦봄 정취에 푹 빠졌을 것이다.
김정일에 얼마나 더 당하려는가
‘천안함 46용사 위령탑’이 서 있는 고지 앞의 짙푸른 바다는 당장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로 맑고 잔잔했다. 이토록 평온한 곳에 북한 잠수정이 침투해 초계함을 두 동강 내고 46명의 목숨을 앗아갔구나. 폭침 현장은 그곳에서 불과 2.5km 떨어져 있다. 바로 눈앞이다. 북한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고 평화로운 바다를 비극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백령도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북한의 위협을 절감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위령탑에 새겨진 비문은 이렇게 용사들을 기린다. “서해바다를 지키다 장렬하게 전사한 천안함 46용사가 있었다. 이제 그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려 여기 위령탑을 세우나니 비록 육신은 죽었다 하나 그 영혼, 역사로 다시 부활하고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자유대한의 수호신이 되리라.”
과연 46용사는 국민의 가슴속에 살아 있을까. 북한이 사흘 전 남북 비밀접촉을 공개한 이후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란만 봐도 결코 그렇지 않아 보인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북한의 주장을 근거로 연일 총리와 통일부 장관을 공격한다. 관례를 깨고 남북 당국의 비밀접촉을 공개한 북한에 대한 비난 못지않게 정부를 탓하는 목소리도 무성하다. 무력도발에 대한 북한의 시인과 사과, 재발방지 약속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다지만 천안함 비극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한 정부의 행보도 미덥지 않다.
청와대도, 통일부도, 국가정보원도 1·2차 남북 정상회담의 폐해를 잘 안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 배경에는 김정일과 손잡은 전임 대통령들의 대북정책에 대한 반감이 자리 잡고 있다. 북한은 걸핏하면 정상회담 합의를 지키라고 요구하지만 스스로 남북 정상의 약속을 깬 게 한두 번이 아니다. 2007년 10·4선언 3항에는 ‘남과 북은 한반도에서 어떤 전쟁도 반대하며 불가침 의무를 확고히 준수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김정일이 약속하고 서명한 문건이다. 그래 놓고 북한은 우리 해역에 공작원을 보내 군함을 공격했다.
이미 남한 대통령 두 명을 연속적으로 끌어들여 속여먹은 김정일이 세 번째 정상회담에는 정직하게 나올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그가 천안함을 공격하고 연평도를 포격했는데도 만나고 싶어 하는 또 다른 남한 대통령을 보면서 압박을 느낄 리도 없다. 오히려 우습게 볼 것이다.
이 대통령, 백령도에 다시 가기를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도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면 벌을 경감해야 한다. 그러나 끝까지 참회하지 않는 죄인은 엄중하게 다스려야 범죄가 줄어든다. 정부는 대북제재로 북한이 1년에 3억 달러씩 벌금을 무는 셈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이 변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가는 것도 방법이다. 북한의 술책에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고, 억지로는 정상회담을 하지 않는 전례를 만들어야 남북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천안함 폭침 나흘 뒤인 지난해 3월 30일 백령도 현장을 찾았다. 가라앉은 함미와 함수를 겨우 찾아내 실종자 수색작업을 할 때였다. 이 대통령도 경황이 없었다. 그가 현장에서 남긴 말은 “아주 과학적이고 종합적으로 조사한 뒤 투명하게 공개하라. 절대 예단하지 말라”는, 지금 생각하면 할 필요도 없는 지시였다. 이 대통령이 차분한 마음으로 백령도에 다시 가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군통수권자가 국가안보를 굳건히 할 수 있는 해답은 현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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