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이 죽었다는 소식을 19일 인도 뉴델리에서 들었다. 1994년 7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김일성의 사망 뉴스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묘했다. 파리 특파원이던 17년 전에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취재를 위해 출장 중이었고, 이번에는 관광길이었다. 신문기자로서 필자의 관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독재자의 죽음이 북한의 미래와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이었다. 나폴리에서는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을 애도하는 성명을 발표한 덕분에 G7 정상회의보다 더 비중 있는 기사를 쓸 수 있었다. 인도에서는 뭔가 할 일이 없을까. 나머지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 항공편을 알아보면서 고민하던 중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떠올랐다. 주인공 이명준의 실제 모델인 반공포로들이 정착한 나라가 인도다.
소설 ‘광장’ 실제 모델의 북한 전망
우리 대사관의 도움으로 현동화 가야여행사 회장(79)을 인도 출발 직전 만났다. 그는 인도에 생존해 있는 유일한 반공포로였다. 꼿꼿한 자세와 강렬한 눈빛에서 태어난 땅을 거부하고 생면부지의 나라를 정착지로 선택해 사업가로 성공한 인생역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18세 어린 나이에 중위 계급장을 달고 전쟁터로 끌려 나갔다가 포로가 됐다. 1953년 포로 석방 때 공산당이 통치하는 북한으로는 죽어도 돌아가기 싫어 인도를 선택했다. 기회가 오면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해야겠다는 꿈도 있었다.
현 회장은 김정일 사망 소식을 듣고 ‘북한도 변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은 승계 준비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권력투쟁이 발생할 것이다. 몇 년 전 모스크바에서 만난 북한 유학생들이 북한 체제 비판을 거침없이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북한 고위 관리 자식인 학생들이 ‘북한 체제는 잘못됐고 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정은 체제에서는 북한 주민의 불만이 터져 나올 가능성이 크다.” 중립국 인도에서 남북한을 객관적으로 관찰한 현 회장의 분석은 들어볼 만했다.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북한 집권층에게는 충격이지만 억압받는 주민에게는 기회다. 2011년 12월 17일 이전과 이후의 북한이 같지는 않을 것이다. 중동처럼 북한 내부에서 권력 교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올 기미가 보인다면 외부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전 세계가 조롱하고 경멸하던 3대 세습이 정작 눈앞에 닥치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은 지체 없이 김정은 체제를 지지하고 나섰다. 10년 주기로 권력 교체를 하는 자기네보다 훨씬 저급한 김일성 일가의 세습을 앞장서 지지하는 중국 지도부의 뻔뻔함이 역겹다. 중국이 말하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고작 이것인가. 북한의 세습 권력을 온존시켜 주민들을 계속 탄압하고 굶도록 놔두자는 것 아닌가. 김정은을 거론하며 후계구도에 변화가 없다고 밝힌 미국 백악관의 브리핑도 성급했다. 북한은 백악관 논평을 전하며 미국이 김정은 체제를 인정했다는 선전용으로 활용하고 있다.
北 3대 세습 이대로 인정할 건가
김정은 눈치 보기가 미국이나 중국의 국익에는 손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중국은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고 내년 재선 여부를 심판받는 버락 오바마는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지나친 몸조심이다. 정부가 못하면 국회에서라도, 아니면 정당에서라도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는 성명이라도 하나 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세습독재에 몸서리를 치는 북한 주민이 용기를 얻고, 김정은이 조금이나마 부담을 갖지 않겠는가. 우리가 김정은 체제를 이대로 인정하고 나면 앞으로 북한에 무슨 변화를 촉구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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