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사진전이었다. 일본 도쿄 신주쿠의 고층빌딩 ‘L타워’에는 전시회를 알리는 아무런 안내 표시가 없었다. 권위 있는 니콘살롱 사진전의 평소 모습이 아니었다. 1층 로비에서부터 묻고 물어 힘들게 28층 전시장을 찾았다. X선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고 경비원들은 가방 속까지 살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비로소 ‘중국에 남겨진 조선인 위안부 할머니들 사진전’이라는 전시회 포스터가 보였다. 극우세력의 위안부 사진전 훼방
사진전이 이상한 이유를 알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전시장 문이 열리기 직전에 나타난 일본 청년 2명이 행동으로 이유를 설명했다. 건장한 체격에 야쿠자 스타일로 머리를 짧게 자른 이들은 20여 분간 전시장을 헤집고 다니며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었다. “왜 거짓말 사진전을 하나.” “역사왜곡 하고 있네.” “김치 냄새 심하게 나네.” 극우파 단체의 회원들로 보이는 청년들의 입에서는 ‘조센진’이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튀어나왔다.
사진전의 주인공은 중국에 살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 8명이다. 사진작가 안세홍 씨는 중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할머니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할머니들은 하나같이 늙고 병들고 남루한 모습이다. 한국 지도를 쓰다듬는 할머니의 사진에는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끌려가 성노예로 지내다 객지에서 외롭게 말년을 보내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 많은 일생이 오롯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안 씨는 어렵게 사진전을 열었다. 올 1월 신청자 48명 가운데 안 씨를 포함한 5명을 전시자로 선정한 니콘은 5월 22일 일방적으로 전시회를 취소한다고 통보했다. 니콘 관계자들과 접촉한 안 씨는 취소가 니콘 자체의 결정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는 “니콘의 주요 주주인 미쓰비시가 전쟁물자 생산으로 성장한 회사여서 사진전 취소 압력을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며 “일본 우익단체들도 니콘 제품 불매운동을 하며 반발했다”고 전했다.
다행스럽게도 도쿄지방법원이 니콘의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안 씨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전시회가 성사됐다. 전시회 취소 통보가 전달된 시점부터 일본 우익들이 안 씨에게 협박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죽이겠다” “일본을 떠나라”고 위협하는 e메일도 쏟아졌다. 마지못해, 최대한 조용히 사진전을 치르려는 니콘의 결정 배후에는 위안부 동원을 비롯한 전쟁범죄를 부인하려는 일본의 극우세력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사진전에서 부닥친 일본 극우파의 얼굴에 하루 전인 7일 게이오대 한중일 세미나장에서 만난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의 모습이 겹쳤다. 고노는 관방장관 시절인 1993년 일본 정부가 위안부 동원에 관여한 사실을 최초로 시인하는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일본의 우경화를 거론하면서 “반성하는 마음에서 새로운 일본을 만들려고 했는데 안타깝다”고 했다. 일본 우익들은 최근 조직적으로 고노 담화 철회를 요구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위안부 사진전은 19년 전으로 돌아가려는 극우파들에 좋은 먹잇감이었다. 19년 전 고노 장관 담화가 무색하다
6월 26일부터 7월 9일까지 계속된 사진전에 일본인 7900여 명이 다녀갔다. 이들은 “역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안타깝다” “부끄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위안부 할머니들 앞에서 숙연해진 많은 일본인에게 기대를 걸지만 극우세력이 독버섯처럼 커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일본 민주당 정권은 과거사 왜곡과 독도 침탈 기도에 이어 집단적 자위권 확보와 핵개발을 노리며 보수당보다 더 우경화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정치권과 거리의 극우세력이 손을 잡으면 일본이 괴물로 변할 가능성도 있다. 일본 정부가 한국의 ‘좋은 이웃’이 되려는 노력을 포기한 것 같아 더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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