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 칼럼]21세기판 淸日전쟁과 북핵

  • 입력 2005년 5월 26일 0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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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칼부림이거나 소리 없는 포격이다.

일본에 머물던 우이(吳儀) 중국 부총리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의 면담 약속을 보란 듯이 깨고 귀국해 버렸다. 돌연의 일격에 일본은 흥분의 도가니다. 마치무라 노부타카 외상은 “국제 매너도 없는 중국”이라며 격노했다. 매스컴은 대서특필한다.

마치무라 외상은 “중국의 부랑자 시위대가 베이징의 일본 공관을 부순 일전의 항일 데모와 똑같다”고 흥분한다. 지난달 중국의 거센 항일 시위 때 “잘 통제된 폭도”라고 했던 일본이다. 중국의 속내를 꿰뚫어본 반격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를 둘러싼 중일의 한판 승부가 숨 가쁘게 펼쳐지고 있다. 일본 총리가 태평양전쟁 전범(戰犯) 14명의 혼을 기리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로 시작된 분규가 지역 패권을 둘러싼 기세 싸움으로 확전됐다. 이제는 한낱 혼령 위문 문제를 넘어섰다. 중국의 ‘경제적 대두’와 일본의 ‘발언권 확대’가 부딪치는 살기등등한 전선(戰線)이다.

111년 전 청일전쟁의 패배 이래 고개를 숙여 온 중국의 급부상. 일본의 경제대국에 걸맞은 파워 추구와 군비(軍備) 욕망. 동북아시아의 두 대국이 내뿜는 거대한 운동에너지가 야스쿠니에서 충돌해 불타고 있는 것이다. 과거사를 내걸고 있으되, 오늘의 이해관계와 미래의 사활을 건 불상용(不相容)의 한판이다. 한 세기 만에 돌아온 ‘세기의 천체(天體)쇼’에 비길 만하다는 박건우 전 주미대사의 관찰은 날카롭다.

경제 교류는 뜨겁되 정치는 얼어붙어 있는 중일 간의 정랭경열(政冷經熱) 형국은 야스쿠니 줄다리기가 평정되지 않는 한 그대로 갈 것이다. 과거사의 연장선상에서 당장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놓고도 한판 겨뤄야 할 처지다. 중국-대만 문제, 댜오위(釣魚) 섬 영유권 문제, 해저자원 개발 문제 등으로 격돌이 벌어질 것이다.

청일전쟁은 대륙이나 열도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벌어졌다. 중일 각축에는 반드시 한반도가 연루된다. 그래서 이 세기의 쇼를 밤하늘 올려다보듯 즐길 수만은 없다. 더욱이 중일은 한국의 사활이 걸린 북한 핵문제 6자회담에도 당사자다.

23일 일본의 도쿄대에서 열린 ‘한반도의 공존과 동북아 지역협력’ 심포지엄에는 북한만 뺀 6자회담 멤버가 총출동했다. 나종일 주일 한국대사,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일본 외무성 심의관, 청융화(程永華) 주일 중국공사, 마이클 마하라크 주일 미국공사, 알렉산드르 로슈코프 주일 러시아대사가 참석해 토론을 벌였다. 핵심은 역시 북핵이었고 참가국들의 견해차는 그대로 드러났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시각차는 확연했다.

중국의 청 공사는 “동북아에서 먼저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대화와 협력을 통한 상호 신뢰와 존중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안전도 배려하고 평등하게 사귀는 것이 중요하다. 군비경쟁이나 일국주의(一國主義)가 아닌 방향으로 가야 한다”며 다분히 미국과 미일동맹을 겨냥했다. 물론 6자회담의 활성화와 한반도 비핵화도 거듭 주장했다.

일본의 다나카 심의관은 동북아의 안전보장 문제가 (북한 때문에) 기초부터 불안정하지 않으냐고 반문하면서 북핵, 미사일 발사, 일본인 납치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자신을 위해서라도 정책 전환을 통해 6자회담에 복귀하고 이득을 얻어 나가는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본은 미국에 철저히 기대면서 중국을 겨냥하고, 미국 역시 일본의 손을 굳게 잡고 중국 견제에 나서고 있다. 반면 중국은 북핵 문제 등에서 한국과 보조를 맞추고, 일본의 유엔 안보리 진출 저지에 한국이 공조할 것으로 믿을 것이다. 중일의 각축과 북핵 방정식이 어떻게 귀결되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과 진로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대륙과 열도의 전쟁은 보이지 않지만 이미 시작됐다.<도쿄에서>

김충식 논설위원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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