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는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예측할 수 없는,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사례가 없는 일이 가끔 일어나곤 한다.
미래학자들은 이렇듯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을 ‘X-이벤트’라 부른다. 여기서 ‘X’는 2000년대 초반 미국 폭스TV가 제작해 큰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X파일’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면 된다. 국내에선 1997년 외환위기가, 해외로 확장하면 미국의 ‘9·11테러’가 X-이벤트라 할 만한 사례였다.
최근엔 국내 정유업계가 X-이벤트에 버금가는 충격에 빠져 있다. 지난해 SK이노베이션은 37년 만에, 에쓰오일은 34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를 냈다. GS칼텍스의 대규모 적자 탓에 GS그룹 지주회사인 ㈜GS도 2005년 출범 후 처음 적자로 전환했다. 영업이익 기록을 매년 갈아 치우던 수년 전은 물론이고 지난해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성적표다.
SK이노베이션 직원들은 당장 연봉 10%를 토해 낼 위기에 처했다. 2009년 회사가 만든 ‘임금유연화제도’ 때문이었다. 연봉의 10%를 미리 적립해두고 세전 이익이 3000억 원 이상이면 이자까지 더해, 3000억 원 미만이면 적립금만 돌려받는 게 주요 골자다. 그런데 제도를 만든 경영진이나 여기에 동의한 직원들 중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조항이 있었다. 경영 적자가 나면 적립금 전액을 반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게 현실이 된 것이다.
직원들은 동요했다. 그냥 맡겨 놓았다고 여겼던 한 달 치 월급을 막상 받지 못하게 된 샐러리맨들의 불만은 클 수밖에 없었다. 지난달 말 SK이노베이션의 한 직원은 “은행이 부도날 줄 알고 돈 맡기는 사람이 누가 있나”고 한숨을 쉬었다.
회사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정철길 SK이노베이션 사장은 직원들의 적립금을 그대로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문제의 씨앗이 된 임금유연화제도는 아예 폐지하기로 했다. 정 사장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할 카드로 ‘직원들의 사기’를 선택한 것이다.
잃은 것도 분명 있다. 회사는 스스로 정한 룰을 버렸고 정 사장은 부임하자마자 원칙을 깬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되짚어 보면 SK이노베이션은 ‘사상 첫 적자’라는 X-이벤트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다. 경영진들이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를 예상했다면 임금유연화제도라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도 X-이벤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국가부도’가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 현실화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특히 정부나 정치권이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다 보면 X-이벤트의 출현 확률은 더 커질 것이다. 한 기업이 제때 준비하지 못한 것은 그 집단이 감내하면 그만이지만 정부 정책의 실패는 전 국민의 위험과 직결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X-이벤트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미리 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최근의 ‘복지 구조조정’ 주장들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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