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사랑하는 이여, 유령이 되어서라도 와 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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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27일 03시 00분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전 세계의 문학도와 문학 애호가의 순례지인 요크셔 주의 브론테기념관에 가 보면 에밀리 브론테가 생전에 살았던 방에서 바로 묘지가 내려다보인다. 영국에서는 교구민들의 묘지가 교회 마당이었는데 브론테의 아버지가 목사였고 목사관이 교회 묘지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황량한 목사관에서, 인근에 교류할 만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지 않아서 자기들끼리 기대어 살았던 여섯 어린 천재의 이야기는 어떤 소설보다도 더 극적이다. 그들의 아버지는 어찌나 지독한 독재자였는지 친척이 아이들에게 황무지에서 뛰어놀라고 예쁘고 빨간 장화를 한 켤레씩 선사했는데 빨간색이 죄스러운 색깔이라고 모조리 벽난로에 태워 버렸다고 한다.

여섯 남매는 ‘앵그리아’ ‘곤달’ 같은 상상 속의 왕국을 만들어서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사랑과 모험과 배신의 이야기를 각자, 그리고 같이 지어 내며 놀았다. 브론테기념관에는 남매가 깨알 같은 글씨를 빼곡히 쓴 명함 크기의 책장을 두껍게 제본해서 만든 ‘저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남매에 관한 일화는 무수히 많다. 에밀리는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브랜웰(에밀리의 오빠)이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하면 좋지?’라고 묻자 ‘먼저 타일러 보고, 안 되면 매질을 해야죠’라고 답했다고 한다. 가난해서 딸들을 자선학교에 보냈던 아버지는 모든 재력을 외아들을 뒷받침하는 데 썼다. 그러나 브랜웰은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키고 집에 돌아와 음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런 오빠를 에밀리만이 옹호하고 동정했다고 한다.

‘폭풍의 언덕’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1847년에 처음 나왔을 때는 혹평을 받았고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 직전에 나온 언니 샬럿의 ‘제인 에어’는 즉각 선풍을 일으키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제인 에어’를 훨씬 능가하는 인기를 누리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은 사실 원제 ‘Wuthering Heights’의 부정확한 번역이다. 언덕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언쇼 가의 저택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의 이름을 넘어 책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는 제목이다.

‘폭풍의 언덕’에는 인물들이 만들어 낸 천둥벼락과 폭풍이 휘몰아친다. 이 소설은 어쩌면 지구상에서 가장 기이한 소설이다. 자기들밖에는 어떤 것도 안중에 없고 인간적인 미덕이 거의 없는 주인공들에게 무수한 독자가 매혹되어 그들을 응원하기 때문이다. 캐시와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문명인의 사랑이 아니다. 히스클리프는 학식도 교양도 없고 무례하고 거칠다. 캐시 역시 숙녀다운 교양이나 세련됨이 없다. 둘 다 성질은 제멋대로이고 극도로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 존재를 다해서 서로를 사랑한다. 사실 ‘사랑’한다기보다 서로가 존재의 필수조건이다.

에드가의 청혼을 수락하고 나서 캐시는 하녀 엘런에게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자기가 비천해질 것이기 때문에 에드가와 결혼한다고 말한다. 그 말을 히스클리프가 엿듣고 즉각 집을 나가 버리지만 캐시는 연이어 에드가와 결혼하면 히스클리프를 비천함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줄 수 있겠기에 에드가와 결혼한다고 말한다. 물론 에드가를 그렇게 이용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도 히스클리프가 있으면 자기는 존재할 수 있지만 히스클리프가 없으면 온 세상도 자기를 붙들어 두지 못한다’고 말한다.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그보다 더 철저하다, 아니 처절하다. 캐시가 죽은 지 거의 20년 후에 캐시의 유령이 나타났다고 하니까 창문을 열어 제치고 “들어와, 들어와, 캐시. 와 줘. 오, 한번만이라도!”라고 절규한다. 에드가의 사후(死後) 합장을 위해 캐시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곳에 가서 캐시의 관을 열어 보면서 “내가 캐시의 해골을 보기를 두려워할 것 같은가?”라고 말한다.

이런 사랑의 힘에 전율하던 독자도, 캐시가 히스클리프와 합세해서 에드가를 비겁자라고 조소하라면서 “히스클리프가 당신을 흠씬 두들겨 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대목 같은 데서는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달갑지 않은 히스클리프의 방문을 아내를 위해서 참아 내던 에드가가 히스클리프가 누이동생 이사벨라를 유인하려는 것을 알고 그의 방문을 금지했을 때이다.

히스클리프는 자기를 머슴으로 만들어 캐시와 갈라놓은 힌들리는 물론 자기를 증오해 마땅하지만 아량으로 참아 낸 에드가나 자기를 흠모한 이사벨라도 원수처럼 미워해서 잔인하게 파괴한다. 그리고 힌들리의 아들 헤어턴을 막일꾼으로 키우고 자기 친아들마저 경멸하고 증오해서 아들의 명을 재촉한다. 캐시의 딸에게는 손찌검도 삼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이 이 작품에서는 놀랍게도 두 사람의 사랑의 절박성과 절대성을 강화해 주고 비극성을 고양하는 듯하다. 여러 비평가는 합리성을 기반으로 발전해 온 서구인들의 은밀한 소원이던 합리성에서의 해방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해 왔다.

소설 속 두 주인공의 사랑이 하도 살벌하고 비정해서 어떤 학자는 작가의 메시지는 자식세대, 특히 캐시의 딸 캐시가 핍박을 받으면서 내적으로 성숙해 가는 모습에 담겨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딸 캐시가 울보 사촌 린턴을 애처롭게 여겨 죽기까지 여러 날 정성껏 돌보는 모습은 가상하지만 시련이 끝나자 다시 철부지 명랑 소녀가 된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어머니 캐시와 히스클리프의 화산 같은 활력에 비하면 존재가 미미하다. 이 소설의 형식은 2중 액자 소설이다. 히스클리프가 차지해서 세놓은 린턴 가 저택의 세입자인 록우드가, 엘런이라는 그 집에 오래 봉직하던 가정부에게서 린턴 가와 언쇼 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전하는 형식이다. 이 형식은 엘런의 기억력과 해석의 정확성과 정직성에 관해 풍성한 논란을 야기하며 이 작품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증폭시켰다.

● 폭풍의 언덕 줄거리는


요크셔 황무지의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언쇼 씨의 집에는 십대 중반의 아들 힌들리와 여섯 살 난 딸 캐시가 있었다. 언쇼 씨는 어느 날 리버풀에 갔다가 집시 소년 하나를 데리고 돌아온다. 소년은 성과 이름이 따로 없이 그냥 히스클리프로 불리는데 언쇼 씨는 소년을 아들보다도 더 소중히 여긴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원수처럼 미워하고, 히스클리프와 동년배인 딸 캐시는 소년을 너무 좋아해서 둘은 매일 붙어 다닌다.

언쇼 씨가 사망하고 힌들리가 가장이 되자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머슴처럼 부린다. 열두 살이 된 캐시는 아랫동네의 지주 댁 린턴 가 자녀와 교제하고 히스클리프는 자기의 모습과 처지에 비관한다.

몇 년 후, 캐시가 에드가 린턴의 청혼을 수락한 날 히스클리프는 사라져 버린다. 캐시는 히스클리프가 없어진 것을 알고 폭우 속에 그를 찾아다니다가 열병에 걸려 거의 죽다 살아나고, 3년 뒤 에드가와 결혼한다. 그 뒤 캐시가 임신을 했을 무렵 히스클리프는 부자가 되어서 돌아온다.

풍채와 몸가짐이 당당해지고 신사같이 변모한 히스클리프는 캐시를 만나기 위해 에드가의 집을 무단히 드나든다. 그는 아내를 잃고 음주에 빠진 힌들리에게 노름 밑천을 빌려 주고 집을 저당 잡는다. 후에 힌들리는 폐인이 되어 죽고 언쇼 가는 히스클리프의 손에 넘어간다. 히스클리프는 에드가의 동생 이사벨라가 자신에게 반하자 그녀를 경멸하면서도 에드가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사벨라를 데리고 도망친다. 상심한 캐시는 심신쇠약 상태에서 딸을 출산하고 죽는다.

이사벨라는 히스클리프의 냉혹함과 잔인성에 경악하고 그에게서 도망쳐서 아들 린턴을 낳는다. 에드가는 캐시가 낳은 동명의 딸 캐시를 애지중지 기르며 12년간 평온하게 산다. 그리고 이사벨라가 죽자 조카 린턴을 데려온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히스클리프는 친권을 행사해서 당장 이튿날 새벽에 린턴을 데려간다. 시간이 흐른 후 히스클리프는 어린 캐시에게 린턴이 많이 아프며 캐시를 보고 싶어 한다면서 유인해서 감금하고 린턴과 강제 결혼을 시킨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드가는 상심해서 세상을 뜨고 병약한 린턴도 앓다가 곧 죽는다. 히스클리프는 이제 언쇼 가와 린턴 가의 모든 재산을 차지한다.

그렇게 20년을 언쇼 가와 린턴 가에 조직적으로 철저히 복수한 히스클리프는 캐시의 유령을 본 후 캐시를 만나러 간다고 하고서는 죽는다. 딸 캐시와 힌들리의 아들 헤어턴은 연인이 된다. 동네 사람들은 캐시와 히스클리프의 유령이 석양에 다정히 같이 거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다음 회에는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섄디’가 소개됩니다.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에밀리 브론테#폭풍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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