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유리 파편 위를 사뿐히 걷는 여인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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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는 빅토리아조 후기 문단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문학사가였고 어머니는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친 미인 가계의 후손이었다. 그래서 버지니아도 빼어난 미인이었고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수만 권 장서 중에서 어느 책이나 뽑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20대 초부터 당대 최고의 청년 지식인이자 예술가 그룹인 ‘블룸즈버리’의 여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린 시절 이부(異父) 오빠들에게 당한 성희롱의 충격으로 인해 네 번이나 정신병 발작을 겪어야 했고 평생 남성에 대한 성적인 거부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숭배했던 어머니를 13세 때 잃었고 신혼의 언니, 친부 오빠, 사랑했던 조카의 젊은 죽음은 치유될 수 없는 상실이었다.

이렇게 남들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과 내면으로 느끼는 자신의 괴리를 첨예하게 의식해서인지 울프는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이라는 유명한 글에서 어떤 사람의 진실은 그의 재산이나 지위, 외양 등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의식 속을 오가는 무수한 상념 속에 들어 있다고 말했다.

‘댈러웨이 부인’(Mrs. Dalloway·1925년 출간)은 울프가 본격적으로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소설이다. 주요 인물들의 의식 속에서 현재의 사람, 사물, 개념들이 과거의 사람, 사물, 사건들의 기억을 연상 작용으로 끊임없이 불러오는 것을 보여 준다. 여주인공 클래리사에게는 너무도 많은 것이 33년 전에 친정집 보턴에서 애인 피터와 헤어질 즈음의 일들을 상기시킨다. 이 소설의 제2의 중심축인 셉티머스라는 청년은 참전의 후유증으로 공황장애를 앓고 있어서 함께 참전했다가 전사한 친구 에번스의 죽는 모습 등 환영(幻影)을 계속 본다. 이런 몇 가지 열쇠만 터득하면 독자가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을 공유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이 작품의 무대인 1923년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5년 후여서 전쟁의 상처가 웬만큼 치유되고 사람들이 다시 생의 의욕을 되찾고 경기가 회복되어 활기가 넘칠 때였다. 여주인공 클래리사는 그날 저녁에 그녀가 여는 파티를 준비하면서 하루를 보내며 소소한 기쁨과 실망, 기대와 불안을 느낀다. 그리고 애인이던 피터와 헤어지던 즈음의 기억은 어제 일보다도 선명하게 그의 의식 속에서 반복 재생된다.

그녀와 피터는 열렬히 사랑했는데 피터는 영국의 전통과 인습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이었고 클래리사를 세속적이라고 비난했기 때문에 클래리사는 괴로웠다. 그와 결혼하면 자신의 모든 가치관, 태도, 행동동기를 끊임없이 분석당하고 비판을 견뎌야 할 것이기에 독립적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 단순한 리처드 댈러웨이와 결혼했던 것이다. 리처드는 영국적 가치를 진심으로 신봉하기 때문에 성심껏 수호하는 순수한 남성이다.

클래리사가 그날 저녁에 파티를 여는 것은 남편의 원활한 의원직 수행을 돕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피터가 생각하듯이 순전히 세속적인 목적에서만은 아니다. 클래리사에게 파티는 모인 사람들이 각자의 뻣뻣한 자아를 잠시 누그러뜨려서 타인과의 소통과 공감을 이룩하고, 그렇게 이룬 짧은 화합은 보석처럼 간직했다가 외롭고 고단할 때 꺼내 보며 위로받을 수 있는 자산이다. 울프의 어머니는 사람들의 화합을 이끌어 내는 달인이었기 때문에 울프에게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파티는 삶의 제전이었다.

현실에는 물론 많은 괴로움이 있다. 마치 증오의 화신과 같아서 클래리사에게 소름을 돋게 하는 킬먼 양이 외동딸 엘리자베스의 영혼과 애정을 채어 가려 하고 있고, 병치레를 하고 난 이후 남편과의 부부관계도 소원해졌다. 브루턴 귀부인이 그날 점심식사에 그녀는 빼놓고 남편만 초대한 것도 소외감을 준다.

그러나 클래리사는 비관에 몸을 맡기지 않는다. 아침에 런던의 거리를 걷는 것은 즐거움이고, 거리에서 부닥치는 작은 사건, 새로운 물체도 호기심의 대상이다. 단골 꽃집의 점원이 그를 반기고, 집의 하녀가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섬기고 싶어 하는 것도 크나큰 행복이다. 이런 작은 기쁨들이 그녀를 절망의 심연에 빠지지 않게 해 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서구인들이 19세기 내내 기대했던 문명 발전에 의한 인류의 완성 가능성을 무너뜨렸다. 친구이며 군대 상사였던 에번스가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고도 아무 느낌이 없었던 셉티머스는 그 때문에 자신을 믿을 수 없고 인간을 믿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셉티머스에게는 인간이 시체를 먹는 독수리로 보였고, 그 독수리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생명을 내던졌다. 그리고 클래리사는 그가 몸을 던져 그 독수리의 발톱을 피한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또한 셉티머스가 죽음으로 외쳤고 소통했다고 생각했다.

울프의 소설과 에세이들은 그 문체가 지극히 서정적이어서 마치 시처럼 읽히고 재치로 반짝반짝 빛난다. 그 거대한 분노와 슬픔과 원한을 이렇게 아름답게 승화한 울프는 애처로운 철의 여인이 아니었을까?    
    
● 댈러웨이 부인 줄거리는


1923년 6월 어느 수요일, 영국 의회 의원인 리처드 댈러웨이의 아내 클래리사는 그날 저녁에 자기 집에서 여는 파티에 쓸 꽃을 사러 외출한다. 런던의 상쾌한 아침 공기와 활기찬 거리는 그녀를 설렘과 기대로 부풀게 한다. 한편 그 상쾌함은 30여 년 전 처녀 시절에 친정집 보턴에서 맞던 아침을 상기시킨다. 특히 애인이던 피터와 결별을 결심하던 즈음의 청량한 날들을.

이미 30여 년이 지났지만 클래리사에게는 온갖 광경, 소리, 느낌이 그 시절을 회상시킨다. 그녀는 그때의 일들을 끊임없이 반추하며 피터와 헤어지기로 한 자신의 결정이 옳았었다고 거듭거듭 자신을 설득한다. 그 시절의 기억 속에는 대담무쌍했던 말괄량이 샐리와의 우정도 늘 곁들여진다.

그날 아침에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후 폭격 후유증을 앓고 있는 셉티머스라는 젊은 청년과 그의 아내도 런던의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셉티머스는 비행기가 선전을 위해 공중에 글자를 그리며 도는 것을 누군가가 하늘에서 자기에게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클래리사는 집에 돌아와 파티에 입을 옷을 수선하는데 인도에 주재하고 있는 옛 애인 피터가 갑자기 나타난다. 피터는 새 애인과 결혼하기 위한 법적인 수속 때문에 전날 런던에 왔다. 피터는 클래리사의 파티 드레스를 그녀의 속물성의 표상처럼 바라보고 클래리사는 마음이 상한다.

셉티머스는 길을 걸으며 전투 도중에 자기 눈앞에서 죽은 친구이며 상사였던 에번스의 환영을 본다. 그는 일반의의 권고에 따라 정신과 전문의를 방문하러 가는 길이었다. 저명한 정신과 전문의 윌리엄 브래드쇼 경은 셉티머스의 요양원 강제수용 결정을 내린다.

클래리사의 남편 리처드는 외출했다가 아내에게 줄 장미꽃을 한 다발 안고 귀가한다. 아내에게 꽃을 내밀며 사랑한다고 말하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 그러나 클래리사는 그의 마음을 알고 리처드는 자기 마음이 전해졌음을 느낀다.

댈러웨이 부부의 외동딸 엘리자베스는 가정교사 킬먼과 함께 쇼핑을 간다. 킬먼은 청순한 처녀 엘리자베스의 영혼을 소유하고 싶지만 그녀의 욕심과 초조함은 엘리자베스를 그녀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아내와 귀가한 셉티머스는 맑은 정신이 돌아와서 아내와 잠시 아기자기한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셉티머스를 요양원으로 데려갈 의사가 도착해서 그들의 행복은 산산이 깨어지고 셉티머스는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한다.

클래리사의 파티에는 총리도 참석하고 파티의 분위기가 무르익어서 클래리사는 크게 안도한다. 그런데 늦게 도착한 브래드쇼 경의 부인이 어떤 정신 이상 청년의 자살 때문에 늦었다고 변명을 하고, 클래리사는 잠시 위층으로 올라가서 목숨을 내던진 청년에 대해 생각한다. 손님들이 떠나고 있는 파티장으로 내려오니 남편은 갑자기 성숙해 보이는 딸을 대견해 하고 있었다. 클래리사를 본 피터는 가슴이 떨린다.

※다음 회에는 D.H.로런스의 ‘사랑하는 여인들’이 소개됩니다.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댈러웨이 부인#버지니아 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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