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사랑의 아름다움과 파괴력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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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H 로런스의 ‘사랑하는 여인들’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D H 로런스는 문학사에서 가장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작가가 아닐까. 아직도 그를 본능을 찬양하고 성 본능의 무제한 충족을 옹호한 반지성주의자 정도로 알고 있는 독자가 무척 많은 듯하다.

로런스가 인간의 지성을 불신한 것은 사실이다. 현대문명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성과 감정을 억압하고 지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해서 인간이 왜곡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과 본능에 더 충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사람이 본능에 따라 살기만 하면 세상이 바로잡히고 인간은 행복하게 된다고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사상은 그렇게 값싸고 천박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지성을 불신한 데에는 그의 태생적 요인이 컸다. 로런스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학교의 견습교사를 했을 정도로 지적인 여성이었는데 어떤 축제에서 아버지를 만나 매혹되어 그와 결혼했지만 곧 결혼을 후회하게 된다. 감수성이 여리고 감각이 첨예하게 발달했던 로런스는 어렸을 때는 어머니를 좋아하고 탄광에서 돌아와서도 씻지도 않았던 아버지를 싫어했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난 후에는 아버지 편으로 돌아섰다. 그러니까 로런스가 신분 상승의 추구를 거부하고 자신을 멸시받는 계급과 동일시하기로 결정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광부들로 대표되는 노동자계층의 무교양과 난폭함을 이전에는 역겨워했지만 이제 상류사회의 교활함, 지배욕, 위선적 도덕에 대한 증오에서 본능을 찬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창조한 인물 중에는 ‘무지개’의 톰 브랑웬처럼 소박하고 단순한 자연의 아들로 행복했던 인물도 있지만 그의 주요 인물들 중에서 투박한 비지성인으로 존경할 만한 인물은 없다. 그리고 그가 지향하는 인간관계는 고도의 지성과 의지가 뒷받침되어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들’(1920년 출간)은 사랑과 결혼의 여러 형태, 그리고 행복한 사랑과 결혼의 성립의 제반 장애에 대한 깊고 철저한 고찰이다. 유사한 장애는 대부분의 인간관계에 작용하지만 사랑과 결혼에서만큼 심각하고 첨예하지 않다.

두 남자 주인공 중 한 사람인 버킨은 연인이었던 허마이오니가 자신을 그의 의지에 복속시키려 하는 것에 치를 떨며 그녀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그는 어슐라에게 청혼하면서 열렬한 사랑의 고백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결혼의 형태를 누누이 설명한다.

자신은 결혼에서, 부부가 뜨겁게 밀착되는 폐쇄적 부부관계가 아닌 개방적이고 평온한 관계를 원한다면서, 마치 별들이 각기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지킴으로써 성좌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듯이 남자와 여자가 서로 독자적인 개성의 개체로 머물면서 균형을 이루는 결합, 서로가 상대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결합을 원한다고 말한다. 어슐라는 낭만적인 사랑에 기초한 결혼을 원하기 때문에 그 청혼을 거절한다. 버킨은 나중에 자기의 결혼관이 순수한 관념이었음을 깨닫고 어슐라의 애정을 받아들이며 결혼한다.

제럴드와 거드런의 사랑은 이보다 훨씬 험난하다. 그 지방 제일 부호의 아들로서 인물 좋고 머리 좋고 담력 있는 제럴드와 빼어난 미모에 예술적 재능과 야심, 패기를 갖춘 거드런은 분명 매우 어울리는 한 쌍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렬하게 이끌린다. 그러나 풍요 속에서 자란 제럴드에게는 중요한 것이나 의미 있는 것이 없고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때는 오로지 타인의 의지를 누르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을 때나 어떤 난제나 위험을 극복했을 때뿐이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이런 승리가 의미 있는 성취가 아니고 그의 생애의 공허를 잠시 잊게 할 수 있는 아편과 같은 것일 뿐이다.

그의 아버지가 수익을 올리는 것을 죄스러워하며 고용인들의 복지를 위해 경영하던 탄광업을 그는 3년 사이에 100% 효율적인 근대적 기업으로 만들었다. 제도적인 고용자 복지에 인색하지는 않지만 인정상 무능한 사람을 계속 고용하는 따위의 일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제럴드에게서 동질감을 느끼는 거드런은 강렬한 매혹과 함께 적의를 느낀다. 제럴드가 아버지의 죽음에 비통과 공허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거드런을 찾아가 자기의 목숨을 그녀의 손에 내려놓다시피 했을 때 거드런은 따뜻한 연민으로 그를 받아준다. 하지만 그 일은 두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고 두 사람 사이의 계급적 불균형은 거드런의 오기를 부추겨 결국 파국이 온다.

한편 버킨과 어슐라의 결혼에도 틈이 보인다. 어슐리는 두 사람의 사랑으로 완벽한 행복을 느끼지만 버킨에겐 미흡함이 있다. 제럴드가 죽고 난 후 버킨은 상실감에 통곡하며 자신이 완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여자의 사랑뿐 아니라 남자의 사랑도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로런스의 자연에 대한 묘사, 그의 인물들의 자연과의 교감은 경이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또한 로런스만큼 인간의 ‘몸’을 첨예하게 의식하고 이해한 작가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의 작중 인물들의 감정은 언제나 몸이 먼저 감지한다. 그리고 그의 인물들의 감정은 절대로 단선적이지 않고 복선적이며 이율배반적이다. 이것은 단순히 글재주나 묘사력이 뛰어나서가 아니고 그가 너무도 생생히, 그리고 강렬하게 작품 속의 사물들, 감정들을 온몸으로 느끼며 글을 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사랑하는 여인들 줄거리는


어슐라와 거드런 자매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각기 교사와 예술가로서 자립할 수 있는 경제력도 갖춘 미모의 20대 여성들이다.

거드런은 영국 런던과 프랑스 등지에서 수학하고 활동하다가 잠시 휴식을 위해 귀향한다. 오랜만에 만난 두 자매는 같이 산책을 나가서 이웃 마을의 교회에서 열린 그 지방 부호 크라이치 가문의 딸 결혼식을 보게 된다. 거드런은 신부의 오빠로 손님들을 맞고 있는 잘생기고 당당한 제럴드를 보고 관심을 갖게 된다.

며칠 후 어슐라가 수업하는 교실에 장학사인 버킨이 방문하는데 버킨의 애인인 허마이오니가 무단으로 들어와서 버킨과 교육에 관한 토론을 벌이고, 어슐라는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감지하게 된다.

허마이오니가 자기 집에서 여는 하우스파티에 자매를 초청했기 때문에 어슐라와 거드런은 거기서 각기 버킨과 제럴드와 가까워진다. 어슐라와 버킨은 비교적 순수하게 서로에게 끌리는 반면에 제럴드와 거드런은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리면서 동시에 서로에게서 강한 오만과 철저한 지배욕을 감지하고 경계심과 혐오감도 느낀다.

제럴드의 아버지가 온 마을 사람을 초대한 성대한 야외파티에서 어슐라와 거드런은 보트 놀이를 한다. 이들을 뒤따라온 버킨과 제럴드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며 두 쌍의 남녀는 서로에게 더욱 깊이 이끌리게 된다. 그런데 해가 저물면서 제럴드의 여동생이 익사하는 사고가 난다. 상심한 제럴드는 한동안 거드런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고, 병약한 버킨도 앓아누웠다가 훌쩍 해외로 잠적해 버린다.

두 자매는 매우 상심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버킨은 영국으로 돌아와서 어슐라에게 청혼하고 어슐라는 그가 원하는 결혼의 이상에 동의할 수 없어 거절한다. 버킨은 결국 어슐라에 대한 사랑의 힘에 굴복해서 그녀와 결혼한다. 제럴드와 거드런은 강력한 이끌림 속에서도 팽팽한 자존심 대결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제럴드가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슬픔과 죄의식과 공허를 주체하지 못하고 거드런의 집을 찾아 그녀의 방으로 숨어들었을 때 거드런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서 새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 그러나 점차 근본적 성격의 문제에 거드런의 모멸감이 더해져서 두 사람의 사랑은 폭약을 품은 불꽃이 된다.

제럴드의 제안으로 네 사람은 알프스에 같이 휴가를 가는데, 그곳에서 뢰얼케라는 독일인 조각가를 만나게 된다. 거드런은 뢰얼케와 긴 대화를 나누고 온종일 같이 눈썰매를 탄다. 이에 분노한 제럴드에게 거드런은 모욕과 조롱으로 응대하고 제럴드는 격분해서 그녀의 목을 조르다가 포기하고 홀로 눈 덮인 산을 올라간다. 다음 날 그는 눈 속에서 냉동된 시체로 발견된다.

※다음 회에는 E M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이 소개됩니다.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D H 로런스#사랑하는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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