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눈매와 도도함이 사람을 압도하는 듯하여 보통 사람이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상류층의 전형이었다. 한국 최고 부자의 딸이면서 계열사 사장에, 미모와 젊음까지 갖추었으니 오만이 하늘을 찌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허를 찌르는 의외의 광경이었다. 주주총회에 한쪽 발목에 깁스를 하고 나타난 것이다. 깁스를 한 것만 해도 평소의 오만함을 얼핏 무너뜨리는 약한 모습인데 거기에 ‘엄마 사랑해, 쪽∼’이라는 글씨까지 깁스 위에 쓰여 있는 게 아닌가.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이 엄마의 빠른 회복을 빌며 쓴 것이라고 했다. 한순간 ‘아, 이 여자도 아이 엄마였지!’라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이야기다. 물론 “이혼 재판에서 양육권 싸움을 한다더니 언론 플레이 하는군!”이라는 냉소적 댓글도 많았지만 “차가운 도시 여자로 보여도 의외로 마음은 따뜻한 분일 것 같습니다”라는 긍정적인 반응이 줄을 이었다.
이미 몇 개의 상을 받았고 오스카에도 노미네이트되었던 여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최근 골든글로브 시상식장에 아홉 살 된 아들을 데리고 나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개구쟁이 소년의 예의 바른 모습은 사랑스러웠고, 웨이터에게 오렌지주스를 부탁해 아이에게 건네는 톱 여배우 엄마의 모습은 유명 연예인에 대한 거리감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자기 아이에게 잘하는 모습일 뿐인데 왜 우리는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될까. 케이트 블란쳇은 엄청나게 파워풀한 여배우다. 명성과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굉장히 거만할 거라고 우리는 지레 짐작한다. 그런데 시상식에 아이를 데리고 나옴으로써 그녀는 자신이 따뜻한 인간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환기시켰다. 백악관 집무실에서 어린아이와 함께 뛰고 있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사진을 보고도 우리는 마치 이웃집 아저씨를 보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우리는 왜 권력자(정치가이건, 재벌이건, 유명 연예인이건 여하튼 사회적으로 힘이 있는 모든 사람을 권력으로 본 것은 미셸 푸코 이후였다)가 어린아이에게 잘하는 것을 보면 늘 감동하는가. 연약한 아이들을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은 권력자의 경직된 진지함을 일거에 허물어뜨리면서, 그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경계심을 단숨에 무장해제시킨다. 이것은 불평등에 대한 깊은 불안감과 상관이 있다고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하긴 우리 모두 마음속 깊이 행여 남들로부터 냉혹한 대우를 받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허약한 인간이다. 권력자가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할 때 우리는 그들이 인간의 약함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에 안도하고, 그가 아이에게 대하는 것과 똑같은 태도로 우리에게 대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한다.
르네상스 시대 가톨릭교회가 자애로운 성모 마리아를 부각하려 했을 때 그들은 아기 예수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성화(icon) 제작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다정한 사람이라면 다른 누구에게나 다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이 그림은 강하게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월 기자회견 후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했던 은밀한 원인은 자신의 어린 동생(비록 더이상 어리지 않다 해도)에게 보인 야멸찬 태도에 대한 사람들의 원초적인 불쾌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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