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는 우리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주요 자본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평가하는 기준은 오로지 우리의 외모다. 인간은 우선 시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외모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유발하여, 어디서나 좋은 대우를 받는다. 평범한 외모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무관심의 대상이며, 못생긴 외모는 근거 없이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런 외모를 우리 스스로가 결정했던가? 우리 인생사 중에서 외모만큼 불평등하고, 불공정하고, 악의적으로 비민주적인 요소도 없다. 가난한 집 출신의 아이는 자신의 노력으로 부자가 될 수 있지만,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외모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놓고 흥분하는 사람들도 타인의 못생긴 외모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마음 놓고 조롱한다.
외모에 대한 가치 부여는 원초적인 인간의 본능인 듯하다. 희랍 신화를 소재로 했건, 성서를 소재로 했건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는 모두 아름다운 얼굴의 여성과 날렵한 몸매의 남성들로 가득 차 있다. 아름다운 용모는 불멸성과 신성의 이미지였으며, 사람들은 아름다운 용모에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꼈다. 기사도(騎士道) 소설에서 현대 소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소설의 여주인공들도 아름답고 매혹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못생긴 여자와의 사랑은 그 자체로 코미디이고 형용모순이다. 오늘날 소설의 퇴조는 이와 같은 반자연성에도 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장자(莊子)도 외모를 가장 높은 덕으로 쳤다. 세 가지 덕(德) 중 하나만 있어도 족히 왕이 되는데, 그중의 으뜸은 외모라고 했다. 우선 하덕(下德)은 용맹하여 대중을 끌어모아 병사를 일으키는 능력이다. 중덕(中德)은 천지 만물을 두루 다 아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상덕(上德)은 키가 크고 용모가 아름다워, 어른 아이 귀천 없이 모든 사람이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외모이다. 장자의 잡편(雜篇) 도척편(盜척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비록 우화적인 글이라 해도, 문(文)과 무(武)의 능력보다 외모를 더 높이 놓았다는 것은 당대 사회의 한 단면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어 흥미롭다.
전통사회에서는 마을 사람들하고만 자신의 외모를 비교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TV 화면에는 전국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와 가장 예쁜 여자들만 등장한다. 국내만이 아니다. 전 세계 수십억 명 중에서 선택된 최상위의 미모들이 흰 셔츠 하나만 턱 걸쳐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는 몸매로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의 평범한 외모를 거의 불가능한 미모들과 비교하며 살고 있다. 그 누가 이런 상태에서 마음 편히 살 수 있겠는가. 거의 정신분열의 시대다.
그러나 경제적 자본과 달리 외모의 공화국에서는 소유는 있으되 축적은 없다. 미는 축적되지 않는다. 시간과 함께 점차 소멸하면서 마지막의 절대적 평등을 지향한다. 누군가에게 열 살에 찾아온 외모의 혼란감이 누군가에게는 쉰 살 혹은 예순 살에 찾아온다는 차이만 있을 뿐, 결국 시간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들어준다. 외모 공화국에서는 아무도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지 못한다. 미의 기준이 계량화, 획일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우리는 우선 타인의 외모에서 조롱보다는 존중을, 불쾌보다는 매력을 찾으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 시대의 집단 외모 히스테리를 치유해 줄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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