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굉음 속에서 진격의 거인들이 잔혹하게 상대방의 몸을 찌르면 관객들의 얼굴에도 물방울이 확 튄다. 좀 기분이 나쁘지만, 이 정도는 “핏방울이 아니고 물방울이야”라고 의연하게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그러나 빗자루를 타고 호그와트의 드넓은 창공을 고속질주하며 온갖 모험을 이겨내는 ‘해리포터 앤드 더 포비든 저니’에서는 의자가 순식간에 360도로 회전하고, 180도로 삐끗하기도 하고, 수백 m 낭떠러지로 미친 듯이 떨어져 내리기도 하는데, “이건 현실이 아니고 4D의 가상현실일 뿐”이라고 아무리 내 이성을 작동시키려 해도 소용없다. 죽을 것 같은 공포감과 함께 그야말로 혼비백산하였다. 지난달 아이들과 함께한 여행 중 유니버설스튜디오에서 살아남은 나의 장한 어드벤처 분투기이다.
자연 속에서의 모험이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 가상의 어드벤처들은 저 유구한 원시시대의 위험천만한 모험을 가짜로 재현하여 사람들에게 어떤 원초적 모험에 대한 욕망을 채워주는 것 같다. 여하튼 그것은 가짜이고, 가상현실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체험의 소재와 방식이 아무리 가상현실이어도 그 체험 속에서 느끼는 나의 공포감과 육체적 불쾌감은 너무나 현실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 실재와 가상의 구분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만일 가상과 현실의 구분을 실험하기 위해 가짜 총을 들고 은행에 가 가짜로 강도인 척 연기를 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는 자신이 가상의 강도라는 것을 경찰과 고객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전혀 없다. 객관적으로 실제 강도와 가짜 강도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몸짓이 보여주는 기호체계는 실제 강도의 것과 똑같다. 그래서 어쩌면 경찰은 그에게 실제로 총을 쏠지도 모르고, 은행의 어떤 고객은 정말로 기절하거나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그는 원치 않게 즉각 실재 속으로 들어간다. 가상으로 시작된 사건이 실재의 효과를 발생시키면서, 너무나 실제적인 현실로 끝난다. 장 보드리야르가 시뮬라크르(simulacre)를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들었던 가상의 스토리이다. 그럼 시뮬라크르란 무엇인가?
시뮬라크르란 원본과 이미지 사이의 유사성이 결여된 이미지이다. 다시 말하면 원본이 없는 가짜 이미지이다. 예를 들어 내 사진은 나의 이미지인데, 그것은 ‘나’라는 사람의 실체를 원본으로 갖고 있다. 그러나 빗자루를 타는 해리 포터에게는 그 원본이 되는 실체가 없다. 그저 허구의 이야기를 꾸며내 속이 텅 빈 이미지를 만들었을 뿐이다. 이처럼 원본 없는 이미지가 바로 시뮬라크르다. “사원에 그 어떤 헛된 것(우상)도 금하노라”는 성경 구절의 ‘우상’이 바로 시뮬라크르다. 가상현실의 세계란 바로 시뮬라크르의 세계다. 시뮬라크르는 가상과 실재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실재를 죽이는 기능까지도 갖고 있다.
이세돌에 대한 알파고의 승리에 사람들의 충격이 크다. 가상현실(VR)이라는 새로운 산업혁명의 시대에 성큼 진입한 듯한 느낌이다. 실재를 죽이는 강력한 가상 이미지의 힘이 인간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는지, 그리하여 우리 앞에 펼쳐지는 세계가 멋진 신세계가 될지 아니면 디스토피아가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어서 사람들은 심한 당혹감을 느낀다. 아무래도 인문학적 상상력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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