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글 잘 쓰는 사람이 명성을 얻었지만 요즘에는 말 잘하는 사람이 인기와 존경과 부(富)를 얻는다. 비록 철학책이라 하더라도 책만 써 가지고는 안 되고 북 콘서트나 강연회를 통해 달변으로 청중을 매혹시켜야만 책이 잘 팔린다. 그리하여 북 콘서트, 낭독회, 책 읽어주기, 저자 강연 등의 이벤트가 줄을 잇는다. 김제동 같은 일개 개그맨이 이념의 멘토 지위에까지 오른 것도 다 말에 대한 매혹의 시대 덕분이다. 이제 사람들은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의 저자가 요약해 주는 말을 통해 지식을 얻고, 소설가나 시인이 읽어주는 작품을 통해 문학적 감수성을 키운다. 왜 그런가.
디지털 시대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글이 말보다 우월했던 것은 대량의 전달성과 물질적 보존성 때문이었다. 아무리 유명한 석학의 담론도 강의실에서는 고작 수십, 수백 명의 학생에게 전달되지만 책으로 묶이면 수백만 명의 독자에게 전달되었다. 더군다나 말은 입에서 나오는 즉시 사라져 버리지만 글은 견고한 물질성으로 남아 시간을 거슬러 보존되었다. 문자에 막강한 권위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러나 오늘날 말은 유튜브로, 소셜미디어로 한없이 재생, 확산되고,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완강한 물질성으로 남게 되었다. 굳이 글이 말보다 우위를 점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 디지털 매체가 과거 시대에 말이 가졌던 단점들을 모두 무의미하게 만든 것이다. 디지털 공간에서는 아무리 나이 먹은 문자 세대도 긴 글을 끝까지 읽기 힘들고, 여차하면 다른 곳으로 클릭하거나 스크롤바를 내릴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다. 차분히 글을 읽기보다는 이벤트 공간에서 남의 말을 듣는 편안한 수동성에 너 나 할 것 없이 길들여져 있다. 어쩐지 우리는 고대 희랍 시대로 되돌아가는 듯하다.
고대에는 물론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아주 적었고, 인쇄술이 나오기도 수천 년 전이므로 읽기보다는 말하기가 훨씬 더 중요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같은 서사시는 글 읽어주는 사람이 청중들에게 들려주던 흥미진진한 옛날이야기였다. 우리의 조선시대에도 마을 사람들에게 ‘장화홍련전’을 읽어주던 입담 좋은 전기수(傳奇수)가 있었다.
평생 책 한 권도 쓰지 않고 순전히 말을 통한 변증술로 제자를 가르쳤던 소크라테스는 문자에 대한 불신이 대단했다. 그는 글을 쓰는 사람들을 소피스트라고 부르며 멸시했다. 문자란 영혼이 없는 기록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철학은 모두 플라톤이 문자로 기록하여 후세에 남긴 것이다). 그는 말과 문자를 적자(嫡子)와 사생아로 비유했다. 말은 ‘말하는 사람’이 직접 했으므로 그가 낳은 아들이지만, 글은, 그가 직접 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을 다시 글로 옮긴 것이므로, 정체불명의 사생아 혹은 버린 자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글은 ‘아버지의 부재’이며, 친부살해적 찬탈의 욕망이 들어 있다고 했다.
보수적 가치를 말로 전파하는 데 능했던 한 시민운동가의 논문 표절 문제로 우파 진영이 시끄럽다. 음성언어에 대한 과도한 가치 부여에서 비롯된 지극히 현대적인 사건이다. 말이 글보다 우위에 있는 시대이지만 그 말에 권위를 부여해 주는 것은 여전히 글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글의 친부살해적 성격, 즉 자신을 생산한 사람을 되돌아서 죽이는 기능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