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승리를 위해 싸웠을 때, 그 승리는 나의 것이 되고, 내가 하늘을 날 수 있을 때 하늘은 나의 것이 되며, 내가 헤엄치고 항해할 수 있을 때 바다는 나의 것”이 된다고 했다. 하나의 대상은, 내가 그 안에서 내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때에만 나의 것이 되는데, 그 안에서 내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거기에 참여했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계발서의 한 구절이 아니다. 보부아르의 철학 에세이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오래전의 번역을 다시 손질하면서 생각해 보니, 20세기 중반 세계의 지성계를 강타했던 실존주의 철학은 이제 철학의 반열에서 내려와 대중 속에 스며들어 자기계발의 기본 개념이 되어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조적으로, 또는 윗세대와 분리하여 자신들의 동질성을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붙인 ‘잉여’라는 말 역시 실존주의의 기본 개념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잉여(剩餘)다. 잉여란 꼭 필요하지 않고 남아도는 여분의 것이란 의미이다. 우리는 어떤 목적이나 소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필요한 존재도 아니다. 그저 우연히 아무런 값어치 없이(무상·無償으로) 이 세상에 ‘던져졌다’. 이 세상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나머지, 여분의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무상성(無償性)이고 잉여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본원적으로 당당하게 살 권리가 없다. 그런데 마치 자신에게는 당당한 삶의 권리가 있는 듯 오만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재산 많고 권력 있는 부르주아 계층의 사람들이다. 사르트르가 실존철학의 존재론을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과 연결시킨 접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우연적이고 무상적인 존재이므로 우리의 인생은 오롯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하찮은 비정규직이지만 나중에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되거나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과 기획에 달린 문제이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인간이란 먼 곳의 존재”라는 말이 나왔다. 인간은 ‘지금 그러한 바의 존재’가 아니라 ‘먼 훗날의 어떤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인간을 ‘가능성의 존재’로 보는 실존주의는 참으로 젊은이를 위한 철학이었다. 가능성이란 시간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시간은 젊은이에게 있는 것이지, 노년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선의 문제도 그랬다. 사르트르의 철학 소설 ‘구토’에서 젊은 주인공은 초상화에 그려진 유명 인사의 냉혹한 시선 앞에서 몸이 얼어붙는 듯한 모멸감을 느낀다. 에드거 앨런 포의 주인공은 순전히 시선 때문에 옆방의 노인을 죽인다. 김영하 소설의 주인공은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는 편의점 주인의 시선을 증오하는 젊은 백수 청년이다. 많은 문학작품들에서 타인을 경멸적으로 내려다보는 기분 나쁜 시선은 언제나 기성세대, 노인, 가진 자들이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순수하고 해맑은 영혼은 언제나 젊은이, 혹은 못 가진 자들이다.
그러나 나이 들어 보니, 젊은이가 노인에게 던지는 시선 또한 결코 덜 가혹한 것이 아니며, 덜 가진 자가 더 가진 자에게 던지는 증오의 시선이 항상 정의로운 것만도 아니었다. 다만 노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대변할 문학가를 갖지 못한 채 주변부에 대상으로 머물러 있을 뿐.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철학자나 문학가는 언제나 청년 혹은 장년의 사람들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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