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은 영웅 만들기를 좋아한다. 슈퍼맨, 배트맨, 아이언맨 등 마블코믹스의 영향인지, 아니면 빈약한 역사가 영웅 만들기를 부추기는지는 몰라도 공동체에 위기가 닥치면 어김없이 영웅 스토리가 탄생한다. 9·11테러 때는 뉴욕 시 소방관들이 그랬고 지난해에는 ‘에볼라 의사’가 그러했다.
“살려야…” 메르스와의 사투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으로 기니에서 활동한 뉴욕 출신 젊은 의사 크레이그 스펜서는 작년 귀국 직후 에볼라 판정을 받았다. 자기가 사는 할렘의 아파트는 봉쇄되고 점심을 먹었던 미트볼 레스토랑은 문을 닫았다. 심지어 그는 뉴욕의 명물 하이라인을 걸어서 통근했다. 에볼라의 치사율과 전염력은 메르스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으니 뉴욕시민의 공포심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뉴욕 맨해튼 벨뷰 병원에서 혈장 치료를 받고 완쾌된 그는 퇴원 일성으로 “다시 서아프리카로 가 에볼라 환자들의 치료를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한때 ‘공공의 적’으로 매도되던 그는 미국의 뛰어난 의술과 인도주의 정신을 보여주는 영웅이 되었다.
의사를 영웅으로 만드는 미국과 달리 한국에 상륙한 메르스는 의사 간호사를 ‘몹쓸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 물론 원인이 없지는 않다. 메르스가 전부 병원 내 감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원 시스템이 잘못됐다고 해서 그 안에서 일하는 의료진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의사 간호사야말로 메르스에 가장 많이 노출돼 있는 집단이다. 현재 154명의 메르스 환자 가운데 의사 4명, 간호사 9명, 간병인이 7명이다. 환자를 돌보다 정체불명의 질병과 맞닥뜨리는 게 의료계 종사자의 숙명이라고 해도 이들도 인간이기에 두려움은 똑같다.
2003년 사스 파동 당시 우리나라에 확진환자는 없었지만 의심환자는 3명이 있었다. 당시 의심환자를 간호하도록 명받았던 간호사 4명 가운데 2명이 사표를 냈을 정도로 두려움은 큰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에 메르스를 옮았다고 원망하는 의사나 간호사가 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다.
‘제 옆에 있던 환자도, 돌보는 저 자신도 몰랐습니다… 나중에야 그 환자와 저를 갈라놓은 게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의 병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미리 알지 못해 죄송합니다. 더 따스하게 돌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낫게 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한림대 동탄성심병원의 간호사 김현아 씨는 격리된 상태에서 이런 글을 올렸다.
병원 감염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메르스 극복의 희망도 의사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환자 곁에 있을 겁니다.’ 부분 폐쇄된 삼성서울병원에 누군가가 써놓은 글귀다. 무더운 날씨에 우주복 같은 방역복을 입은 채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음압병상의 환자를 치료하고 자가 격리자로 지정돼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하는 게 의사 간호사다. 이들을 격려하기는커녕 “자녀를 학교나 학원에 보내지 말라”며 가족까지 지역사회가 따돌리는 것은 메르스 공포심의 한국적 발현이라기엔 지나치다. 의료진 가족에 왕따라니
한심한 건 의료진에 대한 불신을 일부 정치인이 부추기고 있는 점이다. 메르스에 걸린 의사의 동선을 공개한 박원순 서울시장이나 메르스 확진 간호사의 거주지와 자녀 학교명을 공개한 이재명 성남시장이 그렇다. 대중이 환호하는 이런 행보로 이들은 ‘영웅 놀이’를 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지만 진짜 영웅은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매일매일 메르스와 직면하는 의료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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