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많은 이들이 더위를 식히고 가뭄을 끝내줄 ‘효자 태풍’을 간절하게 바랐다. 이런 기대를 배반하고 여름 태풍은 한반도를 뒤덮은 고기압에 밀려 일본과 중국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10월 초 태풍 ‘차바’가 한반도 남측을 할퀴고 지나갔다.
면죄부 된 ‘기-승-전-기후변화’
기상청은 “고온 현상 때문에 바닷물 온도가 높아 태풍의 크기에 비해 에너지가 매우 커 이례적”이었다고 밝혔다. 역대 최강급 10월 태풍의 원인이 지구온난화에 있다는 설명이었다. 바다로부터 수증기를 공급받으며 이동하는 태풍은 수온이 낮아지면 위력이 떨어지는데, 실제로 제주도 남측 바다 수온은 10월에도 26도를 기록할 정도로 높았다.
맞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변명으로 들리는 이유는 뭘까. 고윤화 기상청장은 8월 말 이상 폭염의 예측 실패에 대해 사과하며 “기후변화가 이렇게 빨리 현실로 다가올 줄 몰랐다”고 말해 비난을 자초했다. 타성에 젖어 예보했음을 실토한 셈인데 ‘차바’의 경우에도 이런 관행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구 온도 상승을 1.5도 내로 묶어 두자’는 파리기후협정이 예상보다 빠르게 내달 발효하지만 크게 기대할 건 못 된다. 국가별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구속력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기후변화 해결이 쉽지 않은 근본 이유는 따로 있다. 현 세대가 배출한 온실가스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고 기후가 변덕을 부린다 한들 나 죽은 다음인데 무슨 상관이냐는 인식 때문이다. 모두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말처럼 ‘기-승-전-기후변화’ 논리는 기후변화에 대비해야 할 많은 사람들과 기관에 면죄부가 된다.
폭염과 태풍뿐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경주 지진을 계기로 예전에 무심히 지나쳤던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기후변화가 특정 장소의 특정 단층을 자극해 수많은 인명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빌 맥과이어 교수의 인터뷰다. 날씨 패턴이 바뀌는 경우, 예컨대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상승하면 대양분지 가장자리의 지각이 하중에 눌려 지진을 일으킨다는 주장이다. 80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지난해 네팔 지진은 인도 지각판과 유라시아 지각판이 부딪쳐 발생했다. 인도 지각판을 움직인 요인이 인도와 방글라데시 삼각주에서 일어난 해수면 상승과 빈번한 홍수 때문이란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 이론이 맞다면 경주 지진도 기후변화와 상관이 없으란 법이 없다. 한반도도 대양분지 가장자리다.
기후변화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조차도 1차 TV토론에서 “기후변화는 거짓말”이라는 과거 자신의 발언을 부인했다. 우리의 문제는 재난 예보와 방재 시스템에 기후변화가 미칠 무서운 영향력이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태풍은 기후변화가 ‘먼 미래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 문제’임을 보여주면서 안이한 인식에 경종을 울렸다.
예보·방재 시스템 재설계해야
정부는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기후변화를 들먹인다. 이젠 ‘범인’ 지목에 그치지 말고 기상 예보, 도시 설계, 주택 건축 및 방재 시스템을 기후변화를 타깃으로 전면 재설계해야 한다. 또 다른 재난이 닥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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