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의 공감 사회]‘自小說’ 권하는 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3일 03시 00분


고미석 논설위원
고미석 논설위원
청년실업률이 10%를 넘은 상황에서 취업준비생들의 관심은 하반기 대졸 공채에 온통 쏠려 있다. 학력과 스펙 의존도를 줄여 ‘열린 채용’을 외치는 기업이 늘어났으나 구직자들 마음은 되레 무겁다. 첫 관문인 서류전형에서 ‘자기소개서’ 평가를 강화하는 추세라 ‘자소서’가 취업전선의 복병으로 떠오른 탓이다. 대입으로 치면 어느 날 갑자기 논술고사가 전형의 주요 과목으로 출현해 입시생들 가슴을 더한층 짓누르던 때와 상황이 흡사하다.

피 말리는 자소서 스트레스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장에 들어가려면 자소서 스트레스는 더 커진다. 회사가 제시한 항목대로 작성해야 할 내용과 분량이 만만치 않다. 현대자동차의 입사 희망자는 지원 이유와 역량 소개 2000∼3000자, 인생의 가치관과 구체적 입사동기를 각 1000자씩 써야 한다. 공기업인 한국지역난방공사는 상반기 인턴공모에서 26개 항목 8200자 분량을 요구했는데 이 정도면 단편소설의 절반 분량이다. 자소서 난이도가 높은 은행의 경우 이름과 신춘문예를 결합해 ‘신한문예’ ‘우리문예’ 식으로 호칭된다. 신춘문예는 주제의식과 문학적 기량이란 분명한 잣대가 있지만, 인사담당자들은 방대한 분량의 자소서를 어떻게 면밀히 검토해서 엄정한 점수를 매긴다는 것일까.

자소서 비중이 늘어난 것은 지원자의 직무수행 능력을 파악하는 동시에 허수를 솎아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기업 담당자들은 당락에 영향을 미치는 자소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거짓 없이 쓰면 된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당신이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에 대해 비교해 기술하시오”라든지 “당사 브랜드 중 한 가지를 선택해 인지도를 제고시킬 참신한 아이디어와 그 실현방안을 제시하시오”처럼 추상적이거나 전문적인 항목을 만나면 취준생은 좌절감을 느낄 것이다. 청년 구직자에게 확고한 인생관과, 현장경험과 연관된 지식을 요구하는 것은 거짓말을 지어내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취준생들이 자소서를 자소설(自小說·자기소개서+소설)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작년 10월 인크루트가 실시한 취준생과 대학생 조사에서 75%는 ‘자소서 항목이 너무 어려워 입사지원을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답할 정도였다. 유료 컨설팅이나 첨삭지도를 받는 사교육도 생겨났다. 대학생들은 오로지 자소서 항목을 채우기 위해 외국봉사와 단기창업에 뛰어들기도 한다. 스펙 비중을 줄인다는 취지가 또 다른 스펙 쌓기로 변질되는 역설이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2010년부터 컴퓨터가 작성한 뉴스를 선보인 미국 ‘내러티브 사이언스’의 사례처럼 근사한 자소서를 완성해주는 소프트웨어가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일 터다. 외국계 기업은 보통 A4용지 한 장에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소개하는 커버 레터를 요구한다. 글로벌 경쟁력을 외치는 조직이라면 정해진 형식의 자소서에 집착하기보다 차별화한 검증방법을 개발하는 데 공을 들여야 한다.


채용방식 차별화 고민할때


지금의 흐름은 어찌 보면 기업들의 보여주기식 채용이 빚은 난마 같다. 그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이런 방식으론 진짜 인재는 놓치고 고만고만한 수준의 구직자가 합격할 확률이 높다. 그제 한국인의 ‘마음의 온도’가 평균 영하 14도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취준생 그룹의 심리적 온도는 영하 17도로 세대별 설문조사에서 최저를 기록했다. 고용절벽 앞에 선 청년들에게 자소서 부담만 덜어내도 1도는 올라갈 수 있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청년실업#자기소개서#자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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