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의 공감 사회]서울, 어디까지 가봤나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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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 논설위원
고미석 논설위원
길게 도열한 나무들 사이로 자리 잡은 풀밭. 그 위에 돗자리를 펼친 젊은 부부들과 얕은 실개천에서 텀벙텀벙 뛰노는 아이들, 산책로를 따라 걷는 어르신들과 유모차를 끌고 가는 외국인 가족의 모습이 평화롭게 보인다. 세대와 국적에 관계없이 스스럼없이 어우러진 이곳은 ‘경의선 숲길 공원’ 중 연남동 구간이다. 골목으로 방향을 틀면 작은 가게들이 보이는데 내가 찾은 식당에선 이탈리안 셰프가 인사를 건넨다. 서울시가 버려진 철길을 공원으로 조성한 뒤 이곳은 ‘연트럴 파크’(연남동+센트럴파크)라 불린다.

달라진 서울, 수도의 재발견

경의선숲길공원을 걸으며 새삼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지금까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연남동 일대가 ‘핫 플레이스’가 된 것은 민관 합작의 성공사례다. 서울시는 2005년부터 경의선 일부 구간의 지하화가 진행되면서 방치된 철길을 녹색 공간을 만들었고, 그 길을 따라 예쁜 카페와 식당이 들어와 한적했던 동네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서울은 참 많이 달라졌다. ‘고층 빌딩과 삭막한 아파트촌 말고 뭐가 있나’란 자기비하의 편견이 조금씩 무너지면서 요즘 ‘서울의 재발견’에 재미를 붙였다. 서촌행 마을버스 9번 종점에서 시작되는 수성동 계곡 나들이는 짧은 산책으로 서울의 웅장한 전경을 감상하는 환상적 코스다. 해방 직후 실향민들이 정착했다는 남산 밑 해방촌에선 2030세대가 즐겨 찾는 유럽식 선술집을, 한남동 뒷골목에선 원래 있던 대중목욕탕 욕조까지 살린 카페를 만났다. 쌀집 세탁소 같은 동네 주민들의 오래된 일상과 새로 유입된 문화가 합쳐지니 홍콩 싱가포르의 뒷골목 풍경과 닮은 듯 또 다른 정겨움이 느껴졌다.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부지런히 세계 구석구석을 훑고 다닌 젊은 세대가 저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서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재작년 1000만 명을 넘어섰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남대문 고궁 같은 전통적인 관광지 방문은 줄고 홍대인근 강남역 등 신흥 관광지의 인기가 높단다. 한 번 왔던 사람이 다시 오고 싶은 도시를 만들려면 결국 ‘서울의 일상’을 매력 포인트로 만들어야 한다.

한데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청계천 복원으로 주목받은 탓인지 후임 시장들도 연거푸 대형 프로젝트 강박증을 드러낸다. 오세훈 전 시장이 대한민국 수도의 한복판에 천막장터인지 이벤트 무대인지 시위장인지 헷갈리는 광장을 만들 때부터 문화계에서 탄식의 목소리가 높았다. 박원순 시장은 서울역 고가에 공중정원을 만드는 구상으로 반대 여론과 씨름 중이다. 전임자들과 좀 다른 발상을 할 수는 없을까. 동네가 유명해지면 기존 주민들이 임차료 상승 탓에 밀려나는 것을 젠트리피케이션이라 한다. 이를 막을 방안을 마련해 동네의 고유한 개성을 지켜주는 것이 거창한 공원보다 시민과 관광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묘책이지 싶다.

대형 프로젝트 집착 버리길

시민 세금으로 생색나는 대형 프로젝트를 밀어붙이는 것이야 쉽다. 그런 유혹을 떨치고, 보이지 않지만 삶의 질에 본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길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일본 생활용품기업 ‘무인양품’을 세계적 브랜드로 키운 아트 디렉터 하라 겐야는 최근 방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아무것도 안 해서 심플한 것이 아니다. 디자인을 하지 않은 듯하게 보이는 디자인이 가장 공이 많이 들어간다.” 상품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정책을 디자인하는 사람들도 귀 기울여야 할 조언이다.

맑고 청명한 9월, 서울을 답사하기에 딱 좋은 때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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