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보다 600년 앞선 탄화미 발견… 내 인생 최고의 유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13일 03시 00분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2> 여주 흔암리 유적 발굴한 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

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가 7일 경기 여주시 흔암리 유적 근처에 재현된 움집 앞에서 탄화미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여주=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가 7일 경기 여주시 흔암리 유적 근처에 재현된 움집 앞에서 탄화미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여주=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허 참, 임 선생이 미국서 ‘요상’한 걸 배워왔네.”

1975년 11월 경기 여주시 흔암리 발굴 현장. 이곳을 찾은 선배 교수들이 임효재 당시 서울대 고고학과 전임강사(75·서울대 명예교수)를 미덥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땅을 파기도 빠듯한 시간에 임효재가 이끄는 발굴팀은 화덕 자리(爐址·노지)의 흙을 여섯 포대나 퍼 담아 연구실에서 온종일 분석에 매달렸다. 교수들은 궁금했다.

“도대체 뭘 찾아내려는 건가?” “불에 탄 쌀(탄화미·炭化米)을 찾고 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낱알도 찾기 어려운데 땅속에서 그 미세한 걸? 음 알겠네….”

임효재는 1968년 스튜어트 스트루에버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가 창안한 부유법(water flotation technique)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흔암리 발굴 현장에 적용했다. 부유법은 탄화곡물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화덕 주변의 흙을 물에 붓고 위에 뜬 물질을 채로 걸러내 돋보기나 현미경으로 조사하는 방식이다. 탄화곡물은 불에 탄 상태라 미생물에 의해 부식되지 않고 오랫동안 땅속에 보존돼 있다.

유구에서 토기와 같은 인공(人工)의 유물을 찾아내는 게 발굴의 전부였던 당시 국내 고고학계에서 자연 유물을 찾는 것은 시도된 적이 없었다. 40여 년 만에 흔암리 유적을 다시 찾은 임효재는 “모두들 반신반의했지만 한반도 최고(最古)의 탄화미를 결국 찾아냈다”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도 맞바꿀 수 없는 내 인생 최고(最高)의 유물”이라고 회고했다.

○ 일본 학계의 ‘한반도 전파설’을 깨뜨리다

1976년 4월 발견된 탄화미.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10세기 것으로 추정됐다.
1976년 4월 발견된 탄화미.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10세기 것으로 추정됐다.
“선생님, 아무래도 뭔가 나온 것 같습니다.”

1976년 4월 여주 흔암리 현장 연구실. 핀셋으로 부유물을 하나씩 헤집으며 한참 돋보기를 들여다보던 서울대 학부생 이남규(현 한국고고학회장·한신대 교수)가 임효재를 급하게 불렀다. 전형적인 타원형의 탄화미였다. 꼬박 6개월 동안 충혈된 눈으로 작업한 끝에 나온 값진 성과였다. 앞서 임효재는 1972∼1975년 미국 텍사스주립대 유학 시절 부유법을 배웠다. 임효재는 “1970년대 초반까지 우리 학계는 농경유적에서조차 곡물을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눈 뜬 장님’과 같은 처지였다”고 말했다.

발굴팀은 연대 측정을 위해 탄화미와 함께 출토된 목탄(木炭)을 한국원자력연구소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 동시에 보냈다.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양국 연구소에서 교차검증을 실시한 것이다.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는 놀라웠다. 두 연구소 모두 기원전 10세기로 나왔는데, 이에 따르면 흔암리 탄화미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인 동시에 일본보다 600년 이상 앞선다. 흔암리 발굴 이전 최고(最古) 탄화미는 김해 패총에서 발견된 것으로 연대는 기원후 1세기였다.

학계는 흥분했다. 벼농사 기원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한반도 전파설이 깨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일본 학계는 후쿠오카(福岡) 현 이타즈케(板付) 유적에서 발견된 탄화미의 연대(기원전 3~4세기)가 김해 패총보다 빠르다는 이유로 벼농사가 중국 남부에서 일본 열도를 거쳐 한반도로 전파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흔암리 탄화미 발견을 계기로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이로써 세계 고고학 교과서의 내용도 바뀌었다. 임효재는 벼농사의 황해 횡단설을 제기했다. “중국 양쯔(揚子) 강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 중부지방으로 벼농사가 들어왔다고 봅니다. 이후 한강을 따라 퍼지면서 일본 열도까지 전해진 것이지요.”

○ 아시아 문화교류사 열쇠를 찾아

1975년 탄화미를 얻기 위해 흙을 물에 넣은 뒤 체질을 하고 있다. 서울대 박물관 제공
1975년 탄화미를 얻기 위해 흙을 물에 넣은 뒤 체질을 하고 있다. 서울대 박물관 제공
학계는 벼농사의 기원이 고대 아시아의 정치, 사회, 문화를 결정한 핵심 요인이었다는 점에서 흔암리 발굴의 의미를 높게 평가한다. 벼농사가 아시아 대륙을 횡단해 전파됐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문화교류사 연구에서도 중요하다. 1978년 흔암리 발굴보고서는 “흔암리 탄화미는 기원전 7∼13세기 전후 한반도 문화에 영향을 미친 중국 룽산(龍山) 문화의 파급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흔암리 유적은 자연유물이 고고학 연구의 중요한 연구 분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임효재의 제자인 이경아(미 오리건대 교수) 안승모(원광대 교수) 김민구(전남대 교수) 등이 식물고고학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노교수에게 흔암리 유적의 남은 학술적 과제를 물어봤다. “흔암리 유적에 담긴 당시 사회구조가 아직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주거지별로 흙을 채취하면 곡물의 양이나 종류가 각기 다릅니다. 이들 사이에 사회계급이나 기능의 차이가 있었다는 얘기죠. 후학들의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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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여주 흔암리#유적발굴#임효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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