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봄볕은 많은 걸 품고 있다. 희망도 추억도 망울망울 피어오른다. 에이전트2(정양환)도 오늘 따라 맘이 둥실둥실. 마침 주머니에서 퍼지는 ‘까똑’ 소리. 청명하고 발랄하게 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문자 청첩장. 젠장, 봄은 나갈 돈도 한 소쿠리다.
근데 요 청첩장, 그냥 못 넘길 글귀가 있다. ‘어렵사리 결혼까지 이룬 첫사랑을 축복해 주시길….’ 뭐, 천(1000) 사랑이 아니고? 급하게 요원들을 불러 모았다. 이게 가능한 일이냐고.
“본인이 첫사랑이라 믿으면 그게 맞는 거지. 별 의미 있나?”(에이전트26·유원모)
“아니지. 첫사랑은 첫눈을 홀로 밟는 거야. 소중하고 아련한.”(에이전트7·임희윤)
흐음. 첫사랑에 이리도 생각이 다를 줄이야. 여론조사 업체 엠브레인에 의뢰해 성인 남녀 1000명에게도 질문을 퍼부어 봤다. 당신에게 첫사랑은 무엇이었느냐고. 그 시절은 우리에게 어떤 화인(火印)을 새겨 놓았을까.
○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이문세의 ‘광화문연가’)
먼저 간단한 수치부터 보자. 6∼9일 20대 이상 남녀 500명씩 모바일로 설문조사한 결과, 첫사랑 경험 연령은 ‘20∼23세’(34.4%)가 가장 많고, ‘17∼19세’(26.0%)가 그 뒤를 이었다. 첫사랑 대상은 ‘동갑내기나 친구’가 남성(62.8%)은 압도적인 반면, 여성은 46.2%로 ‘선배 등 연상’(45.0%)과 엇비슷했다.
그럼 첫사랑이 떠오르는 순간은 언제일까. 남녀 모두 ‘함께 갔던 장소를 다시 가게 됐을 때’(33.4%)를 가장 많이 꼽았다. 다만 남성은 ‘외롭고 쓸쓸할 때’(26.8%)도 적지 않았다. 또 ‘술에 취했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를 고른 비율이 8.0%로 여성(3.8%)의 2배를 넘었다. 여성은 ‘현 애인(혹은 배우자)이 맘에 안 들 때’(12.4%)와 ‘거의 떠오른 적 없다’(13.2%)를 남성보다 훨씬 많이 선택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남성은 위기 상황에서 심리적 안정감이 필요할 때 첫사랑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며 “여성은 공감을 중요시하는 사회화 과정에 익숙하기 때문에 정서적 이유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첫사랑에게 받거나 준 선물에 대한 기억도 남녀 차이가 뚜렷했다. 남성은 ‘초콜릿이나 사탕 등’(26.6%)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응답했고, ‘직접 만든 종이학이나 십자수 등’(15.6%)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여성은 ‘반지나 목걸이 등 장신구’(19.0%)가 가장 많았다. 특히 종이학·십자수는 5번째(12.8%)로 낮은 순위였다. ○ “Dreams are my reality”(영화 ‘라붐’ 주제곡 ‘리얼리티’)
첫사랑에 대한 오랜 속설도 궁금했다. 가장 대표적인 ‘첫사랑은 결국 헤어진다’는 과연 사실일까. 응답자들을 보면 이는 얼추 들어맞았다. 88.1%가 현재의 애인이나 배우자가 첫사랑이 아니라고 밝혔다. 20대는 75.6%로 비교적 낮았지만 30대 이상은 모두 90%를 넘었다. 흥미로운 것은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가를 O×로 물었을 땐 59.1%가 ‘아니다. 이뤄질 수 있다’고 답했다. 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첫사랑은 가장 처음이 오래 기억되는 ‘초두효과(初頭效果)’를 지녀 오랫동안 마음에 품는다”며 “순수한 사랑만으로 모든 걸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대한 호감이 현실과 다르게 발현되는 것”이라고 짚었다.
첫사랑과 헤어진 이유는 뭐라고 기억할까. 남녀 모두 ‘그땐 철이 없어서’(37.9%)가 1순위를 차지했다. 특이한 점은 여성은 ‘마음이 식어서’(20.2%)와 ‘사랑보다 중요한 게 많아서’(13.4%)가 상당히 많은 데 비해, 남성은 ‘상대가 일방적으로 떠나서’(14.0%)와 ‘내가 잘못해서’(5.0%)가 여성보다 높았다.
헤어진 상대를 다시 만나면 해 주고 싶은 말도 남녀 차이가 컸다. 남성은 ‘잘살라고 덕담을 전한다’(43.8%)가 많았지만, 여성은 ‘가볍게 인사하고 자리를 피한다’(31.6%)가 더 많았다. 여성은 ‘모른 척 지나간다’(22.6%)도 남성보다 2배 이상 높았다. 남성은 ‘그때 미안했다고 사과한다’(9.0%)와 ‘다시 사귀자고 졸라 본다’(2.4%)가 여성보다 3배 정도 많았다.
어떤 식으로건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크게 자리 잡는 이유는 뭘까.
최승원 덕성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긍정왜곡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실은 첫사랑보단 그 시절 자신의 모습과 감정을 가장 아름답게 떠올리는 것”이라며 “순수했던 시절의 음악이나 영화 심지어 정치 체제를 지금도 좋아하고 지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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