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파리에 가서 제 모든 것을 불태우고 왔습니다. ‘명품 하울’이 저는 너무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대리만족도 되고 예쁜 제품을 보면 힐링도 되니까요.”
에이전트 0(김민)은 눈이 번쩍 띄었다. ‘1570만 원 질러 왔어요! 명품 하울/언박싱 같이 뜯어요!’라는 제목의 영상은 패션 유튜버가 자신이 구매한 명품 가방과 의류를 20분 동안 보여줬다. 50만 원짜리 구치 반지갑부터 270만 원짜리 루이뷔통 가방까지. 그녀는 쇼핑백을 열고 박스에서 제품을 꺼내는 모든 과정을 영상으로 보여줬다.
‘쓸어 담다’는 의미를 담은 하울(haul) 비디오는 최근 구매한 물건들을 소개하고 품평하며 때로는 가격도 공개하는 영상을 말한다. 미국에서는 2007년경부터 시작된 하울 비디오는 2010년부터 이미 수십만 건이 업로드됐다. 정보기술(IT) 얼리어답터들의 새로운 전자기기 ‘개봉기(언박싱)’ 형태에서 출발한 하울 비디오는 점차 쇼핑한 의류나 화장품을 소개하는 형태가 주를 이루게 됐다. 인기 영상은 수천만 뷰까지 기록한다. 한국어로 된 쇼핑 하울 비디오는 6만 건가량 검색됐다. 수백만 원어치에 이르는 ‘럭셔리 제품 하울’은 한국에선 최근 몇 달 새 시작된 현상이다. ○ 대리만족과 속물근성 사이
에이전트 0의 눈에 ‘명품’과 ‘1570만 원’이란 단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금액을 강조한 것이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영상 속 유튜버는 “지난번 구치 영상을 찍었을 때 ‘돈 자랑 하냐’는 댓글을 달아주신 분이 계시다”며 “저는 돈 자랑이 아니라 제 돈으로 산 제품을 자랑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일부는 ‘상대적 박탈감’ ‘세관에 신고는 제대로 했냐’는 댓글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한 지상파 방송의 PD는 “신상품을 소개하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구매한 제품을 칭찬만 하는 것이어서 후기로 보기도 어렵다”며 “객관적 정보보다 보여주기에 무게 중심이 있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영상을 소비하는 대다수는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부정적 댓글에는 “본인이 능력이 있어서 산 것인데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반박도 달렸다. “나도 더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는 자극이 된다”거나 “살 수 없지만 영상으로나마 대리만족이 된다”는 반응도 있었다. 무엇보다 “예쁘다”는 댓글이 가장 많았다. 이 영상은 85만9000번 조회됐다. 또 다른 인기 뷰티 유튜버의 800만 원 쇼핑 하울 영상은 조회 수 210만, 좋아요 3만9000건에 달했다. ○ 자랑보다 비즈니스
미국의 하울 비디오 크리에이터인 엘 파울러, 블레어 파울러 자매의 영상은 조회 수가 1억 건을 넘는다. 이들 영상의 제품이 품절되는 등 영향력이 입증되자 협찬 제의가 쏟아졌다. 2008년 영상을 찍기 시작했을 때 학생이었던 파울러 자매는 학교도 그만두고 전업 크리에이터가 됐다. 이들 자매도 미국에서 쇼핑 중독을 부추긴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틴 초이스 어워즈’의 웹스타 상 후보에 2011년, 2012년, 2014년에 연달아 이름이 올랐고 이들을 소재로 한 소설까지 나왔다.
크리에이터들은 하울 비디오를 생산자의 관점에서 보라고 말했다. 한 온라인 영상 제작자는 “하울은 단순한 자랑이 아니라 엄연한 비즈니스”라고 했다. 그는 “돈이 된다는 걸 재빠르게 캐치하고 센스 있게 영상화하는 것도 능력”이라며 “광고 수익으로 최소한 지갑값은 건질 것”이라고 했다. 명품 하울 비디오를 두고 욕을 하건, 칭찬을 하건 조회 수가 올라갈 때마다 광고료가 입금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후기나 구매기를 통해 바이럴 홍보를 담당했던 ‘파워블로거’의 역할이 영상으로 옮아가는 과정”이라고 분석도 했다.
한때 파워블로거를 꿈꿨던 에이전트 0, 이제는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기로 결심하는데….(다음 회에 계속)
:: 하울 비디오 :: 영상 제작자가 최근 구입한 패션·뷰티 제품을 개봉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특징이나 가격을 소개하는 리뷰 형식의 비디오. 영어 ‘홀(haul·끌다)’에서 따온 용어지만 국내 유튜버들은 ‘하울’ 영상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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