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9일 오후(현지 시간) 총리 집무실인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기자회견을 마치고 들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자칫 집무실에 일하러 다시 못 들어갈 뻔했던 자신의 상황을 역설적으로 빗댄 말이다. 그가 이끄는 보수당은 318석을 확보해 간신히 제1당을 유지했지만 이전보다 12석을 잃고 과반(326석) 유지에 실패했다. 자신이 임명한 현직 장관 5명이 선거에서 떨어졌다. 당내 입지를 다지고 이민자 차단을 포함한 ‘하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추진하려 총선을 자청했던 메이 총리에겐 ‘혹 떼려다 혹 붙인’ 결과다.
‘영국 우선주의(Britain First)’를 외치며 지난해 6월 호기롭게 EU 탈퇴를 결정했던 영국인들은 당분간 극심한 내홍에 휘말릴 운명이다. 메이 총리는 선거 직후 “총리직 사퇴는 없다”며 10석을 얻은 북아일랜드 연방정부 정당인 민주연합당(DUP)과 공동 정부 구성에 사실상 합의했다. 그러나 노동당을 비롯한 야 3당은 “레임덕인 총리는 오래 버틸 수 없다”며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BBC 로라 쿤스버그 에디터는 “메이가 조기 총선 결정이라는 현대사 최악의 실수로 94년 만에 가장 짧은 재임 기간이란 불명예를 걱정할 처지에 놓였다”고 비꼬았다.
과반 정당이 없는 이른바 ‘헝 의회(hung parliament)’가 출범하면서 브렉시트의 운명 역시 시계 제로 상태다. 한껏 기세가 오른 야당은 EU와의 단일 시장을 유지하는 ‘소프트 브렉시트’를 요구하고 있다. 역시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기치하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를 권좌에 앉힌 미국인들도 같은 날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폭로로 ‘거짓말 대통령을 둔 나라’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미국 정치 체계의 핵심인 ‘견제와 균형’ ‘사법기관의 독립’을 망각한 ‘워싱턴 아웃사이더’ 트럼프의 폭주는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이날 코미 의회 청문회장에서 만난 워싱턴 시민 잭 스피어스 씨는 “트럼프가 혼쭐나는 것을 보고 당장은 기분 좋을지 몰라도 미국의 위상과 자존심이 추락하는 것을 동시에 목격하고 있어서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통합과 개방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을 주도했던 영국과 미국에서는 지난해 브렉시트와 대선 과정에서 분열과 단절이라는 반동이 유행했다. ‘자국 이기주의’를 외치다 위기에 빠진 대서양 동맹의 불안한 행보에 또다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