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적인 미술가 백남준은 현대예술과 비디오를 접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글씨는 ‘N’ ‘w’ 등에서 보듯이 모서리의 각이 두드러져서 분석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경기중, 경기고를 나왔고 일본 도쿄대, 독일 뮌헨대, 프라이부르크음악학교, 쾰른대에서 미술사, 미학, 음악학, 작곡, 현대음악을 공부한 수재답다. 그의 필획은 꾸밈이 없고 삐뚤빼뚤하여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과 상상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플럭서스, 비디오 아트, 레이저 아트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을 찾아 변혁을 꿈꿔 온 예술 탐험은 그의 탁월한 분석력과 어린아이 같은 상상력이 기초가 된 것으로 보인다.
‘m’자가 갈수록 작아지고 ‘a’가 작고 울퉁불퉁한 것을 보면 그는 비밀주의자였을 것이다. 또 그의 글씨는 첫 글자가 위아래로 길고 커서 자존심이 강하고 과시욕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59년 독일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22에서 데뷔작인 ‘존 케이지에 대한 오마주’를 초연하며, 공연 중에 바이올린을 내리쳐 부쉈다. 이듬해에는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습작’을 발표하면서 2대의 피아노를 파괴하고 관람객의 넥타이와 셔츠를 잘라냈다. 이런 충격적인 퍼포먼스들은 아마도 철저하게 계산하고 비밀스럽게 준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의 글씨에서 충동성은 찾기 어렵다.
‘R’의 윗부분이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아 말이 많은 편이었을 것이다. ‘e’가 둥근 형태를 보이는 것이나 ‘a’의 울퉁불퉁한 형태로 보아도 사교적이다. 그는 존 케이지, 요제프 보이스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동료들과 함께 광범위하게 작업을 했다. 1984년 뉴욕과 파리, 베를린, 서울을 연결하는 최초의 위성중계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을 발표하는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했던 그의 유해는 서울, 미국 뉴욕,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다.
구본진 변호사·필적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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