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을 두고 당대의 명필이었지만 친일 행적 때문에 글씨가 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완용은 중국의 미불(米芾), 동기창(董其昌) 같은 여러 명인의 서법을 깊이 연구할 정도로 서예에 심취했다고 한다. 독립문 현판이나 직지사 대웅전 글씨도 그가 썼다는 주장이 있고, 2005년 한국국제교류재단이 홈페이지에서 이완용을 “당대 위대한 서예가”라고 칭송했다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서예와 인격이 일치하는지는 과거에도 논쟁거리였다. 청나라의 전대흔(錢大昕)은 예술과 인품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일 뿐이라고 주장했고, 명나라의 풍반(馮班)은 예술과 인품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했다. 그 중간 입장을 취한 송나라의 소식(蘇軾)은 예술이 분명 인품과 관련이 있지만 기교로 은폐할 수 있기에 반드시 일치할 수는 없다고 했다.
명필인지 아닌지를 가리려면 그 평가 기준부터 세워야 할 것이다. 소식은 글씨에는 신(神·정신), 기(氣·기상), 골(骨·골격), 육(肉·근육), 혈(血·혈색)의 다섯 가지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어느 것 하나라도 결핍되면 좋은 글씨라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이완용은 정신이나 기상, 골격이 모두 약하다. 손재주가 발달해서 획의 운용이나 글씨 구성에서 기교가 있지만 절제미가 없고 품격을 갖추지 못했다. 필획이 깨끗하지 않고 군더더기가 많으며 꾸밈이 지나치다. 인격을 떠나서 글씨 자체만으로도 이완용을 명필이라고 할 수 없다.
이완용 필체의 특성은 간찰에서 두드러진다. 서예 작품에선 기교를 많이 부려 눈속임을 했지만 간찰은 다르다. 그는 글씨를 밑으로 뻗치게 썼는데 독창적이고 즉흥적이며 감정적인 성격이었을 것이다. 행 간격은 좁아서 옆 행의 글씨에 거의 닿아 있는 것을 보면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속도가 빠른 것은 판단이 빠른 인물임을 알려준다. 글자 크기, 행 간격이 들쭉날쭉한 것에서 예측하기 힘든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구본진 변호사·필적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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