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10대 부자였던 간송 전형필은 전 재산을 털어 민족문화재 수집과 보호에 앞장섰다. 그의 수집품 중에는 훈민정음 해례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혜원전신첩 등 국보와 보물이 즐비하다. 나라를 빼앗기는 불행한 시기여서 수집이 가능했지만 그래서 더 가치가 있다. 그가 세운 보화각(현재 간송미술관)은 국내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다.
간송의 글씨는 부잣집 아들다운 여유로움과 배짱, 강직함과 올곧음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인물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크고 정사각형 형태의 글씨는 통이 크고 대범하지만 모범적이고 정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ㅎ’의 꼭지가 커서 최고가 되려는 의지가 강함을 알 수 있다. 모서리에 각이 두드러지거나 마지막 필획에 삐침이 강한 것은 올곧고 의지가 강함을 보여준다. 매우 긴 가로선은 인내심이 특별히 강함을 뜻한다. 전체적으로 필획이 통통하고 글자의 구성 부분 사이의 간격이 넓은 점은 여유와 너그러움을 의미해서 부잣집 아들답다. 철두철미하고 의지가 굳으며 성공지향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재벌 1세들의 글씨체와는 많이 다르다.
크기와 기울기에는 변화가 꽤 있으며 때로는 괘선 밖으로 나가기도 하는 불규칙성이 드러난다. 여기에 필획이 부드러운 것을 더해 보면 간송은 예술적 감성이 꽤 풍부했을 것이다. 이런 필체는 수집가보다는 예술가들에게서 자주 보인다. 이런 예술적 감성과 최고를 지향하는 간송의 취향이 수준 높은 컬렉션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간송은 감식안도 높았다고 전하지만 아마도 진위를 구별하는 능력은 부족했을 것이다. 필체가 논리와 치밀함이 요구되는 감식가와는 거리가 멀다. 수집 과정에서 까다롭고 빈틈없는 오세창 같은 분들의 감식안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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