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6월 15일, 북한 경비정이 연평도 인근 북방한계선을 넘어오자 남한 해군은 고속정과 초계함을 동원해 응전한다. 북한 경비정과 어뢰정이 공격하면서 남북한 사이 교전이 벌어졌다. 서해교전, 즉 1차 연평해전이었다.
당시 박찬욱 감독과 ‘공동경비구역 JSA’ 제작을 한창 준비 중이었던 나는 뉴스로 사건을 접하며 과연 영화를 완성해 개봉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이런 현실에 ‘남북 병사들의 우정’을 다룬 이야기가 가당키나 할 것인가. 하지만 이미 많은 준비와 비용이 투입된 때였다. 어쩌랴, 영화 만들기는 함께하는 많은 이들(배우, 스태프 등)과의 약속이자 나의 숙명인 것을.
2000년 2월 촬영을 시작한 영화는 그해 봄 촬영을 마쳤다. 그리고 며칠 후 놀랍게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만난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하늘이 영화를 돕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해 6월 5일 이 영화 촬영을 위해 남양주종합촬영소에 대규모로 조성한 판문점 세트장을 영화진흥위원회에 기증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1년 사이 영화의 운명은 지옥과 천국을 오간 셈이다.
판문점 세트장 T2(군사정전위원회 회의장)와 T3(소회의실) 사이 폭 50cm, 높이 5cm의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북한 오경필 중사(송강호)와 정우진(신하균), 남한 이수혁 병장(이병헌)과 남성식 일병(김태우)이 마주 보며 근무한다. 오경필은 이수혁에게 “(분계선 너머로) 구림자 넘어왔어. 조심하라우”라고 말하고, 둘은 서로 침을 뱉으며 장난친다. 영화처럼 바로 이곳에서 어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났다.
비무장지대에서 지뢰 사고로 만난 남북 병사들은 공동경비구역의 선을 넘어 북한 초소에서 짧고 뜨거운 시간을 보낸다. 초코파이를 나눠 먹고, 술잔을 부딪치고, ‘위대한’ 미제 지포라이터를 선물로 나눈다. 이데올로기가 그어놓은 선을 넘나들며 나눈 병사들의 우정은 여름밤 짧은 불꽃축제처럼 끝을 향해 달려가고 발각되는 순간, 학습된 이데올로기의 트라우마가 이들로 하여금 서로에게 방아쇠를 당기게 한다. “우리도 전쟁 나면 서로 쏴야 돼?”라고 물었던 남한 청년은 최후의 일격으로 동생이라고 부르던 북한 청년의 숨을 끊어버린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절룩이며 건너온 남한 병사들은 총소리가 난무하는 일대 혼전 앞에서 꿈처럼 그들만의 시간과 작별한다. 이 영화는 이념을 저울질하거나 소재주의로 흐르지 않았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살고 있는 민족의 비극을 미스터리 스릴러로 풀어갔지만, 종국엔 남북 병사들의 사랑에 가까운 우정을 통해 우리 앞에 놓인 한반도의 비극을 읊조린다.
한반도 분단 이후 55년 만에 이루어졌던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공동선언 이후 2007년의 남북 정상 간 두 번째 만남, 그리고 다시 11년 만에 이루어지는 2018년 4월 27일의 남북 정상회담이 ‘이제 다시’ 우리 앞에 펼쳐졌다.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두 정상의 만남이 부디 의미 있는 결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18년 전 박찬욱 감독과 남북 분단의 비극을 영화로 이야기했던 나는 특별한 감회에 젖는다. 지금, 여기 우리 모두의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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