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명의 인생 영화]장애인을 둔 가족이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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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길버트 그레이프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대표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대표
내 아버지는 4년 전 어느 날 아침, 침을 흘리고 표정이 어눌해지더니 쓰러졌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치매가 찾아와 중환자실과 회복실을 오가다 퇴원했다. 지팡이에 지탱하며 흐느적거리는 걸음걸이도 시간이 지나자 휠체어에 앉는 신세가 됐다. 뇌의 손상이 언어 능력을 빼앗아버렸다. 돋보기안경도 쓰지 않고 신문을 읽던 아버지는 글도 읽지 못한다. 신문을 볼 수 없으니 자신의 처지를 이곳에 까발린 사실을 모를뿐더러 그러니, 상처받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발병한 초기엔 갑자기 많이 웃고, 소리 지르고, 울던 격렬한 감정의 표현도 지금은 많이 흐릿해졌다. 뿌옇게 바랜 눈동자의 색깔만큼이나 무감동, 무반응의 얼굴은 그를 둘러싼 우리를 덜 힘들게 한다. 지금도 여전히 휠체어에 앉아 있지만, 다행히도(?) 비교적(?) 건강(?)한 상태로 지낸다.

얼마 전 모 방송 프로에 출연한 배우가 자신이 분했던 지적장애인의 말과 표정을 재연해 보라는 패널들의 요청에 응했다.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은 박장대소로 화답했다. 누군가는 명백한 장애인 비하이며 혐오를 조장하는 몰지각한 방송의 행태라고 비난했다. 나는 지적장애인이나 지체장애인인 당사자와 그의 가족들은 대략 어떤 심정일까 갑자기 궁금했다.

그래서 다시 찾아본 영화가 ‘길버트 그레이프’(1994년)다. 세기의 미남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레오)가 스무 살에 18세 어니 그레이프를 연기했다. 코를 찡긋거리고 손가락을 흔들어대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지적장애인 소년 역을 ‘실제’처럼 연기했다. 작은 마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버릇으로 가족과 이웃들을 힘들게 하는 소년이지만 레오의 무시무시한 연기력은 관객으로 하여금 섣부른 연민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집 지하실에서 목을 매 자살한 아버지 때문에 7년 후 200kg이 넘는 ‘인간고래’가 된 뚱보 엄마와 직장에서 잘리고 집안일을 책임지는 누나, 사춘기를 지나는 여동생, 그리고 장애인 어니를 돌보는 길버트 그레이프(조니 뎁 분)의 어깨는 무겁다.

길버트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영화이지만 뎁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른 인물들을 받쳐주는 연기를 한다. 영화 속 길버트처럼. 피터 헤지스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엔 가슴 치는 대사들이 많다. 자유롭게 여행하며 떠돌이 삶을 사는 아름다운 소녀 벡키가 묻는다.

“길버트,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봐.”, “우선 새로 살 집이 필요하고, 누나가 좋은 남자를 만났음 좋겠고, 엄마가 에어로빅이라도 시작했음 좋겠고, 어니의 뇌를 새로 바꿀 수 있음 좋겠고….” “아니, 그런 거 말고. 네가 원하는 거 말이야.”, “나? 난 그냥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에어로빅을 끝내 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엄마의 시체와 함께 그를 옥죄었던 집을 불태우는 길버트는 어니와 함께 비로소 처음으로 집을 떠난다. “잠깐 머물렀다 가는 그들이 부럽다. 동생이 살았으면 좋겠다가도 때론 죽는 게 나을 거란 생각도 든다”라고 혼잣말을 하던 길버트가 벡키네 차를 타고 길을 나설 때도 무구하게 웃어젖히는 동생 어니는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있다.

24년 전 이 영화를 봤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그때는, 지금의 나를 예상하지 못했다. 수십 년 만에 다시 본 ‘길버트 그레이프’가 더 쓰게 다가오는 건 그 살아온 시간 속에 답이 있을 것이다.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대표
#인생영화#길버트 그레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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