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날씨의 이른 봄날 아침, 학교에 가는 대신 조조영화를 보러 혼자 극장에 갔다. 개봉한 지 석 달이 넘어서 이제 간판 색이 바래기 시작한 ‘사관과 신사’를. 난방도 들어오지 않는 극장 로비는 이른 시간이라 텅 비었다. 수기로 표를 받는 매표 아가씨의 무릎이 추워 보였다. 1000석에 가까운 넓은 객석엔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꼭 붙어 앉아 있었고 나는 밖에서 좀 서성이다가 불이 꺼진 후 자리에 앉았다. 하필이면 안경다리도 부러져 한 손으로 받친 채 스크린을 바라보는 스물한 살의 처량함. 1년 다니던 학교를 무작정 휴학하고 구르는 먼지 뭉치처럼 서성였던 때였다. 지금의 청춘보다야 사정이 나았겠지만 무엇을 어떻게 왜 살아야 하는지 막막했고 우울했다.
‘아메리칸 지골로’와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로 당대 최고의 섹시 스타로 막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리처드 기어가 더할 나위 없이 멋지게 나온다고 난리가 난 영화를 나는 부러진 안경을 쓰고 남루한 가방을 든 채 스산한 극장에 뒤늦게 혼자 앉아 보고 있었다.
한 남자의 성공담이자 러브 스토리이며 신데렐라 이야기인 이 영화에서 그때의 나를 사로잡은 건 잭 마요(리처드 기어)의 상처 입고 외로운 청춘의 얼굴이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알코올중독자에 호색가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잭은 지긋지긋한 고향을 떠나 해군사관학교에 입소한다. 장교가 되기 위해선 13주에 걸친 힘든 훈련을 통과해야 한다. 버클이나 군화를 몰래 파는 얄팍한 이기주의자 잭은 무섭게 몰아붙이는 폴리 교관(루이스 고셋 주니어)과 사사건건 부딪히다 퇴소를 종용하는 교관 앞에서 결국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갈 곳이 없어요.”
이 대목에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좁아터졌지만 집도 있고 부모도 있고 친구도 있는 처지란 걸 깨달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청춘의 향방을 가늠하기 어려웠던지 과하게 감정이입을 했나 보다.
이 영화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이기도 하다. 언젠가 장교의 아내가 되어 가난한 공장노동자에서 벗어나기를 꿈꾸는 젊은 여성들 폴라(데브라 윙거)와 리넷(리사 블런트)은 필사적으로 남자들을 찾아다닌다. 잭은 자신에게 냉소적인 폴라와 절연한다. 그리고 그의 인간적인 친구 시드의 자살, 동료들과의 관계를 겪으며 인간적으로 성숙해진다. 드디어 장교가 되어 눈부시게 하얀 제복을 입고 제지공장에 찾아간 잭은 폴라를 번쩍 들어 올려 가슴에 품고 환한 불빛을 향해 걸어 나간다. 백마 탄 왕자님의 현현이자 신데렐라 이야기의 시그니처 같은 장면이다. 여기에 울려 퍼지는 조 코커와 제니퍼 원스의 그 유명한 주제가 ‘업 웨어 위 빌롱(Up Where We Belong)’은 이 영화가 세계적 흥행작이자 당대를 풍미한 상업영화임을 증명한다. 최고의 미남미녀 배우들의 매력이 스크린 밖으로 넘칠 듯 충만하면서도 상처 입고 어두운 내면을 가진 두 남녀의 팽팽한 교감은 얄팍하고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 이상의 감흥도 준다. 1980년대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매력이 대단했던 영화다.
리처드 기어의 열혈 팬이었지만, 흰 제복 입은 왕자님 말고 촘촘한 속눈썹 밑으로 드리운 우울함이 엿보였던 그의 청춘에 나를 대입했던 그 시간. 할리우드 영화 한 편에도 나를 돌아보던 순진한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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