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한 명과 조연 한 명, 시체 3구가 출연 인물의 전부인 영화 ‘그래비티’는 우주전쟁 따위는 없는 우주 재난 영화다. 인공위성의 허블 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해 첫 우주비행에 나선 라이언 스톤 박사(샌드라 불럭)는 임무 수행 중 비상상황을 맞는다. 러시아 인공위성에서 날아온 잔해들이 라이언과 노련한 비행사 맷 코월스키(조지 클루니)를 광활한 우주공간으로 밀어 떨어뜨리고 만다. 영화 시작한 지 13분 만에 닥친 재난이다. “우주에 오니까 좋은 게 뭐냐”는 맷의 질문에 “고요함”이라고 답한 라이언은 사실 가족 한 명 없는 외로운 여성이다. 네 살 딸아이가 술래잡기를 하다 미끄러져 머리를 다쳤다는 사고 연락을 받았을 때 운전 중이었던 그녀는 딸의 죽음 이후, 저녁 8시에 라디오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끝없이 운전만 했다고 맷에게 이야기한다. 쾌활하고 수다스러운 맷에 비해 무척이나 과묵했던 라이언이 처음으로 길게 털어놓은 말이다.
삶의 의지를 잃을 만큼 큰 슬픔으로 집이 아닌 곳을 끝없이 맴돌았다는 그녀는 이제 우주의 무중력 공간에서 또다시 떠도는 존재로 사라질 것인가. 영화 시작한 지 36분 만에 라이언은 온전히 혼자가 된다. 가까스로 진입한 우주정거장 내부는 화염에 휩싸이고 힘겹게 이동한 소유스엔 연료가 없다. 급기야 산소 공급을 차단시켜 자살을 시도하는 라이언. 그러나 우연히 연결된 라디오 주파수에 실려 오는 지구 어딘가의 개 짖는 소리, 아기의 울음소리가 결국 그녀를 살고자 하게 만든다.
“예상되는 결과는 두 가지다. 멀쩡하게 내려가 멋진 모험담을 들려주거나, 10분 안에 불타 죽거나. 어느 쪽이나 밑져야 본전이다. 어쨌든 엄청난 여행일 거다.” 이 말을 끝으로 벌이는 마지막 사투는 경이로운 우주 스펙터클의 연속이다. 위성의 잔해들이 궤도를 완전히 뒤덮는 시간 90분은 곧 이 영화의 러닝타임과 일치한다. 우리는 주인공과 함께 실시간 우주체험을 한 셈이다. 무중력 속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끝내 삶의 의지를 회복하고 지구로 돌아온 그녀는 태초에 직립보행에 성공하는 인간의 모습처럼 힘겹게 두 발로 땅을 밟고 우뚝 일어선다. 3D 아이맥스 스크린으로 보면 더 좋을 이 장면은 그래비티가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비교될 만큼의 걸작임을 증명한다.
감독은 우주정거장 안에서 우주복을 벗고 맨몸이 된 라이언이 웅크린 모습을 다소 노골적으로 탯줄에 연결된 태아의 형태처럼 이미지화한다. 마지막 캡슐의 해치를 열어젖히며 쏟아지는 물과 함께 박차고 나오는 모습은 양수와 함께 태아가 엄마의 몸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이미지와 겹친다. 심리적 재난을 겪은 주인공이 우주 재난 후 각성하는 이 철학적 이야기 속에 태아, 탄생, 여성성을 직조해 낸 감독의 세계관이 각별하다. 에마누엘 루베스키의 촬영, 스티븐 프라이스의 음악이 특수효과의 놀라운 기술력과 만나 완벽한 시청각적 체험을 선사하는 이 영화는 누구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재능과 의식에 기대고 있다. 올해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그는 영화 ‘로마’로 감독상을 받은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술가로서 우리의 책임은 다른 이들이 보지 않는 걸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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