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3월 카자흐스탄의 한 핵물질 보관소. 이곳을 찾은 미국 정부 당국자와 핵전문가들은 눈앞의 광경에 아연실색했다. 콘크리트 벽으로 이뤄진 거대한 건물의 안전장치라고는 가시철조망이 박힌 담장과 허술한 쇠자물쇠 하나가 전부. 거미줄이 쳐진 건물 내부는 먼지를 덮어쓴 철제용기 1000여 개로 가득 차 있었다. 옛 소련 붕괴 후 방치된 핵물질(고농축우라늄)이었다. 총 600kg으로 최소 핵무기 10여 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었다.
미국은 서둘러 ‘사파이어 작전’이라는 코드명으로 핵물질 반출 작업에 나섰다. 그해 10월 대형 수송기 여러 대와 연구진 30여 명이 현지로 급파됐다. 용기에 보관된 핵물질을 440여 개의 항공 운송용 컨테이너로 나눠 담는 데 매일 12시간씩 한 달 넘게 매달렸다. 이후 수송기에 실려 ‘논스톱’으로 본토로 이송된 핵물질은 테네시주 오크리지로 옮겨져 폐기됐다. 이 과정에서 철저한 검증 절차도 이뤄졌다. 핵물질 누락 여부를 그램(g) 단위까지 추적 조사하고, 관련자들을 인터뷰해 추가로 핵물질 저장고로 의심되는 리스트도 확보했다. 미국은 그 대가로 2700만 달러를 카자흐스탄에 제공했다.
이 방식은 옛 소련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폐기 작업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우크라이나 등에 배치된 수백 기의 ICBM을 해체하는 모든 과정을 미 당국자와 전문가, 언론이 참관하고 검증했다. ICBM은 핵탄두를 제거하고, 분해한 뒤 열차에 실어 고철처리장으로 옮겨 분쇄 처리했다. 지하 발사장의 폭파 장면도 낱낱이 공개됐다. 단계마다 핵탄두 일부나 ICBM의 핵심 부품을 빼돌리는 ‘꼼수’가 있는지도 이중 삼중 확인했다. 그 반대급부로 미국은 해당 국가에 많은 돈과 경제적 지원으로 보상했다.
철저한 검증을 담보한 비용부담 원칙은 ‘넌-루거 프로그램(옛 소련의 비핵화 프로젝트)’의 주요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북-미 비핵화 합의와 이행 과정을 지켜보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자칫 한국이 ‘북-미 핵게임’에 판돈만 퍼 주고 뒤통수를 맞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깊어져서다.
하지만 벌써부터 그런 징후가 감지돼 우려스럽다.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비핵화 보상비용을 한국이 주로 부담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폐기 비용 일부만 내겠다는 속내가 확연히 읽힌다.
북한의 비핵화에는 최소 수십조 원이 들어갈 것으로 추정된다. 향후 10년간 직·간접 비용 270억 달러(약 29조 원) 가운데 한국이 80억 달러(약 8조6000억 원)를 부담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동맹’보다 ‘경제적 이익’을 앞세우는 트럼프 행정부가 더 비싼 청구서를 들이밀 여지도 충분하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정부 당국자도 “비핵화 비용의 상당 부분이 우리 몫이 될 것”이라고 했다. ‘비핵화 비용’은 ‘평화와 통일 비용’으로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는 게 그의 논지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허공에 날린 돈이 적지 않은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로 한국은 부담한 북한 경수로 건설비용의 70%(약 11억3700만 달러)는 북한의 합의 파기로 휴지조각이 돼 버리지 않았는가.
이젠 한국이 비용 부담에 상응하는 비핵화 검증에 참여할 때라고 필자는 본다. 북한 비핵화 합의 이후 핵·미사일 시설에 대한 미국 주도의 국제적 사찰·검증에 한국이 ‘핵심 당사국’으로 나서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통해 미 본토를 겨냥한 ICBM과 핵탄두 외에 한국을 위협하는 중단거리 미사일용 핵탄두·핵물질의 실체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안보 우려를 확실히 해소할 수 있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가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생화학무기의 사찰·검증도 예외가 아니다. 2016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한은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 암살에 사용된 신경작용제 VX 등 최대 5000t의 화학무기를 비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탄저균 등 생물무기 10여 종도 다량 보유한 것으로 군은 보고 있다. 생화학탄두가 실린 북한의 미사일과 장사정포는 수십만, 수백만 명의 인명을 살상할 수 있다. 핵무기만큼이나 치명적인 안보 위협의 근원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국이 주도해야 하는 이유다. 앞으로 ‘북한판 넌-루거 프로그램’이 실현된다면 한국은 ‘책임(비용)’에 상응하는 ‘권리(검증 참여)’를 북-미 모두에 요구해야 한다. 북-미 핵협상의 ‘전주(錢主)’로 나섰다가 ‘들러리’로 전락한 뼈아픈 실패가 되풀이돼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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