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호의 밀리터리 포스]김 대위, 진급에 목매지 않게 하기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9일 03시 00분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0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열린 2019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국방개혁 등 주요 현안에 대해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0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열린 2019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국방개혁 등 주요 현안에 대해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1990년대 초 필자가 근무한 부대의 일부 간부들은 고약한 성미로 악명이 높았다. 병사들은 그들과 당직근무라도 서는 날이면 무슨 꼬투리를 잡혀 험한 꼴을 당할지 몰라 노심초사했다. 한 번은 상황실 당직 장교였던 A 대위가 점심 때 한 병사가 건넨 식판을 군홧발로 걷어차며 욕설을 퍼부었다. 반찬 칸의 김칫국이 라면에 섞이는 ‘불경’을 범했다는 이유였다. 주둔지 내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식판을 들고 오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는 병사의 해명에도 그는 ‘건방지다’, ‘군기가 빠졌다’며 호된 기합을 줬다.

B 소령은 한술 더 떴다. 그는 걸핏하면 병사들을 사무실로 불러서 보고서 미흡이나 근무태도 불량을 빌미로 폭언과 함께 머리를 벽에 쿵 소리가 나도록 찧게 했다. 피해 병사들은 신체적 아픔보다 수치심과 모욕감에 분개했지만 ‘군대는 계급이 깡패’라고 푸념하는 것 외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최근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온 지인의 아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서 “요즘은 어떠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아직도 구태가 남아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부대 내 일부 상급자들의 폭언과 전횡 등 비뚤어진 행태를 나열했다.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병영 악습은 대물림되는 것 같아 입맛이 썼다.

하기야 공관병을 종처럼 부리던 대장급 지휘관 부부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게 불과 2년 전이다. 같은 해 뚝배기 집게 등 갖은 도구로 병사들에게 수십 차례 가혹행위를 한 해병대 간부가 적발되기도 했다. 군은 사달이 날 때마다 엄중 처벌과 재발 방지를 공언하지만 ‘병영 적폐’는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게 현실이다. 일각에선 개인적 일탈을 군 전체의 문제로 확대 해석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그럼에도 우리 군에 뿌리 깊게 박힌 ‘계급 지상주의’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지적은 곱씹어볼 대목이다. 부하를 ‘소모품’이나 ‘따까리’(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속어)로 여기는 퇴행적 인식이 병영 적폐의 주범이라는 얘기다. 계급에 온전히 기댄 권위가 떠받치는 군에선 ‘리더(Leader)’가 아닌 ‘보스(Boss)’가 득세할 수밖에 없다. ‘보스형 지휘관’이 잘나가는 군대는 소통과 솔선수범이 아닌 군림과 맹목적 충성이 전염병처럼 창궐하기 마련이다. 부하의 생사여탈을 쥐고 흔드는 ‘계급 갑질’이 팽배한 군대가 싸워 이기는 강군이 될 리는 만무하다.

무엇보다 진급에 다걸기(올인)하는 군 문화부터 일신돼야 한다고 본다. 상명하복과 일사불란한 지휘체계가 생명인 군에서 진급은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우리 군은 진급에 너무 목을 맨다. 진급에 따른 특전과 명예가 군 생활의 전부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오죽하면 ‘동기(위관급)가 경쟁자(영관급)를 넘어 적(장군)이 된다’는 말이 통용될까. 진급을 유일한 목표와 보상으로 삼는 군대일수록 ‘계급 갑질’이 횡행할 가능성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계급에 끼어있는 거품도 더 걷어내야 한다. 현 정부 들어 장군용 관용차를 대폭 축소했지만 여전히 고위 간부용 식당과 목욕탕, 헬스장을 따로 둔 경우가 많다. ‘별 개수’와 비례하는 집무실과 공관의 크기로 권위가 대변되는 형식과 관행도 여전하다.

‘참모총장과 야전사령관 등 대장은 5, 6평짜리 유리벽 사무실을 제공받고, 중장급 이하 장성은 개방형 공동사무실에서 근무한다. 별도 접견실과 내실(內室), 권위적 상징물도 없다. 계급이 높을수록 책상 위 서류뭉치가 늘어난다. 시내에서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장군도 쉽게 볼 수 있다….’

이진규 예비역 해군대령이 2010년 펴낸 ‘국방선진화 리포트’에서 언급한 영국군 장성의 모습이다. 주영 국방무관을 지낸 그는 한국군에는 땀내 나는 장군복과 흙 묻은 장군화가 없다고 꼬집었다. 계급의 허례허식이 군의 관료화를 조장하고, 국방개혁의 발목을 잡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 한국군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국방부는 장군 수 감축과 병영혁신을 골자로 한 ‘국방개혁 2.0’을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계급 지상주의’에 뿌리를 둔 군내 퇴행적 관행과 악습의 환부를 도려내는 작업을 개혁의 출발점이자 근간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선 어떤 개혁 노력도 공염불에 그칠 공산이 크다. 국민이 믿고 의지할 선진 정예강군은 국방예산과 첨단무기만으론 실현될 수 없다는 점을 군 지휘부가 유념하길 바란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sh1005@donga.com
#계급 지상주의#국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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