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호의 밀리터리 포스]‘폭탄주 건배’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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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월 말 미국 하와이주 오아후섬의 한식당에서 송영무 국방부 장관(왼쪽)이 해리 해리스 미 태평양사령관(현 주한 미국대사)에게 그의 이름이 새겨진 이순신 장군 동상 모형을 선물하고 있다. 사진 출처 미 인도태평양사령부 홈페이지
작년 1월 말 미국 하와이주 오아후섬의 한식당에서 송영무 국방부 장관(왼쪽)이 해리 해리스 미 태평양사령관(현 주한 미국대사)에게 그의 이름이 새겨진 이순신 장군 동상 모형을 선물하고 있다. 사진 출처 미 인도태평양사령부 홈페이지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장면1. 2018년 1월 말 미국 하와이주 오아후섬의 한식당. 하와이 전통 꽃 문양의 알로하 셔츠를 입은 한미 양국군 수뇌부들이 돌아가며 폭탄주(소주+맥주)로 축배를 제의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저마다 상기된 얼굴로 한미 동맹을 위해 건배사를 했다. 테이블에는 갈비와 불고기, 김치 등이 가득 차려졌다. 한미 국방장관 회담 직후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해리 해리스 미 태평양사령관 등 태평양사를 지휘하는 미 4성 장군들(함대·육·공군사령관)을 초대한 자리였다. 송 장관에게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이순신 장군 동상 모형을 선물 받은 해리스 사령관은 환히 웃으며 굳은 악수로 화답했다.

#장면2. 1년 뒤인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입구. 정경두 국방부 장관을 비공개 면담하고 나온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동행한 대사관 관계자들과 얘기를 나누며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호원들이 그 주위를 빙 둘러싸며 취재진의 접근을 막았다. ‘정 장관과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관련 논의를 했느냐’는 기자의 질의에도 해리스 대사는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서둘러 차에 올라 다음 목적지인 외교부로 향했다.

해리스 대사의 변신은 한 편의 반전(反轉)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현역 시절 그는 한미 동맹과 대북 억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때마다 핵추진 항모와 B-1B 전폭기 등 미 전략자산을 한반도로 전개해 ‘철통같은(ironclad)’ 연합방위태세를 주도했다. 2017년 8월에는 핵전력을 지휘하는 미 전략사령관과 방한해 언제든 싸울 준비가 돼 있다며 한미 동맹을 시험하지 말라고 북한에 경고도 했다.

하지만 군복을 벗고 ‘외교관’으로 거듭난 그는 딴사람이 된 듯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의 메신저로 한국을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청와대와 외교·국방당국을 압박한 끝에 방위비분담금 지갑을 더 열도록 하고, 유효기간도 5년에서 1년으로 단축하는 데 기여했다. 향후 방위비분담금 협상에서 미국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새삼스러울 게 없다고 볼 수도 있다. 본디 외교란 게 자국의 국익을 관철하는 고도의 정치 행위이고, 외교관 중에서도 재외공관 수장인 특명전권대사는 그 첨병 역할을 수행하는 게 당연하다. 우리로선 답답하고 환장할 노릇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해리스 대사를 책무를 완수한 ‘충복’으로 평가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당혹스럽고 섭섭한 기색이 역력하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해리스 대사가 현역 때와 동맹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달라 충격”이라고 토로했다. 그가 대사로 오면 한국이 처한 안보 상황을 잘 이해하고 힘이 돼 줄 걸로 은근히 기대했는데 뒤통수를 맞은 격이라면서 서운해하는 군 당국자들도 적지 않다.

해리스 대사의 변신을 ‘동맹’보다 ‘자국 이익’을 중시하는 트럼프 시대의 상징적 사례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트럼프가 무대에서 퇴장하면 작금의 동맹 갈등이 치유되고, 한미 관계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와 같은 돌연변이 대통령 때문에 반세기를 훨씬 넘긴 군사혈맹이 이대로 쇠락하진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도 나온다.

하지만 그 반대의 불길한 상상도 해본다. 국제사회에 들불처럼 번지는 자국 우선주의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서다. 자국 이익을 최고 선(善)으로 앞세워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로 질주하는 정치적 포퓰리즘은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국을 넘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협력과 상생보다 자국의 유불리만 따져서 사분오열, 합종연횡하는 정글시대로 국제질서가 퇴행하는 게 아니냐는 경고음도 커지는 형국이다.

한반도를 무대 삼아 주변국들이 얽히고설킨 북한 비핵화 게임도 한 꺼풀 벗기면 자국 이익을 최대한 취하려는 냉엄한 국제정치의 축소판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헨리 템플 전 영국 총리(1784∼1865)는 국가 간에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이 오로지 이익만 존재한다고 했다. 남북, 북-미 화해가 급진전되면서 한반도 정세가 요동칠수록 한미 동맹은 전례 없는 도전과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한미 동맹의 존재 이유가 흔들리거나 의심받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 치밀한 전략을 세워야 할 때다. 넋 놓고 있다가 동맹도, 실리도 놓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sh1005@donga.com
#송영무 국방부 장관#해리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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