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털은 희끗희끗하나 마음은 소년이고/푸른 물은 출렁거리며 세월을 옮겨놓는다./평생 스스로 남아의 뜻이 있으되/다만 안방 가운데 여인네 머리쓰개 쓴 것을 탄식하노라.” ―‘기각한필(綺閣閒筆)’의 우음(偶吟) 기삼(其三) 중에서
19세기 중반을 살았던 매력적인 여성 ‘기각(綺閣)’, 오늘은 그를 소환한다. 활발한 페미니즘 담론의 장에서 거부와 부정, 저항 등의 어휘를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여성의 주체적 내면을 느낄 수 있는 표현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조선시대 사대부 여성 기각은 노성(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청양에서 살았다. 이름과 생몰연도가 전해지지 않지만 그가 남긴 한글 한시집 ‘기각한필’에서 그의 삶과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이 시집에는 조선시대 여성들의 시에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정절이나 열녀 등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일상생활의 희로애락과 한시 학습 과정을 보여주는 시들 속에서 여성의식을 섬세하게 표현한 3편의 시가 주목된다.
‘어항 속 물고기’라는 시를 통하여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강한 욕망을 드러낸다. 물고기는 수영 실력이 매우 뛰어나 작은 물동이 안에 갇혀 지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강한 욕망을 갖고 있다. 기각 자신으로 비유하여 읽는다면 “결코 좁은 규방 생활에 만족할 수 없고 나의 능력을 발휘하여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라는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우음’(우연히 읊은 시)의 세 번째 시에서 이러한 기각의 내면에 자리 잡은 여성의식이 더욱 직설적이고 강하게 표출된다. 머리는 희어졌으나 그 마음은 여전히 소년 같다는 표현에서 아직도 실현하고 싶은 욕망들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젊은 시절이 세월 따라 절절히 흘러 이제 늙었음을 인식하게 되자, 여성으로 태어나 집안에서만 자신의 모든 삶을 보낸 것이 안타까워졌다. 평생 큰 뜻을 품은 것은 당대의 남성들 못지않았지만 그의 일상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난관과 억압은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기각은 이러한 억압적 현실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자신과 그 상황에 대한 자기반성적 성찰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이처럼 그의 내면이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던 세계와 충돌하면서 주체적으로 변모하였다. 말년(1854년)에 지은 ‘ㅱ탄(自歎)’은 “하늘이 내 재주를 내심에 반드시 쓸 데 있건마는/예로부터 현철한 이는 다 마음을 수고로이 하였다./여자로 태어난 것도 한인데, 또 이룬 것이 없으니…”로 시작된다. 그는 타고난 재능과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한탄하고 있다.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은 예전부터 항상 마음이 괴로웠다는 표현으로 자기 자신에게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기 합리화 혹은 자기최면을 걸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형성된 주체적 자아를 자신도 제어할 수 없었다.
기각은 주체적 내면을 가진 개성이 형성되었으나 안타깝게도 강하면서도 도발적인 실천을 감행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시를 통해 억압된 유교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서서히 형성되어 가는 주체적 자아를 보여주었다. 그의 내면은 기존 질서로 편입되지 않고 자기 확장의 길로 나아갔으며, 강렬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하고 섬세한 자신의 내면으로 19세기 한복판에서 큰 울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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