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 금성(錦城·나주 지역)에 사는 25세의 남성과 혼인하였습니다. 낭군은 음양의 마음을 알아 밤을 함께 맞이한 것이 이제 6, 7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단 한 번도 이불 속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 이런 삶은 죽느니만 못합니다. … 젊은 여인이 성적 만족을 주지 못하는 남자의 집에서 헛되이 늙게 하지 마시어, 마침내 만물의 이치에 마땅하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박명첩원정소지(薄命妾原情所志)’ 중에서
전통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드라마에서 여성이 남편 혹은 시가 식구들에 의해 대문 밖으로 내쳐지는 장면을 흔히 보게 된다. 여인은 무기력하게 현실을 수용하고, 친정 부모들은 오히려 딸을 나무란다. 특히 조선은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가 여성들을 억압하던 사회였다. 이혼 앞에서 여성들은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에 정면으로 도전한 여성들이 있었다. 이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이혼 과정과 이에 대한 인식을 보기 좋게 무너뜨리고 있다.
유정기는 아내와 사별한 후 신태영을 만나 1677년에 재혼하고 12년 동안 5명의 자녀를 낳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첩이 생기자 아내가 난폭하고 사당에서 행패를 부렸다는 이유로 내쫓는다. 유정기는 신태영이 집을 나가자 ‘아내가 정절을 잃었다’며 별거한 지 15년이 지난 1704년에 이혼신청서를 제출한다. 예조(禮曹)는 유정기의 이혼신청을 기각했다. 그는 집안사람 50명의 서명을 받고 다시 이혼신청서를 제출했지만 역시 기각된다. 유정기는 숙종에게까지 이혼을 청원했다. 이에 의금부에서 신태영을 조사하였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무죄를 증명했다. 이 과정에서 유정기는 관리를 매수한 사실이 드러나 7개월간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석방됐고, 신태영은 논리적 반박이 남편 모욕이었다는 이유로 유배를 간다. 유정기는 재차 이혼을 위한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68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예조는 그의 이혼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내 신태영은 가부장의 횡포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지켰다.
조선 말기 한 여성은 이혼신청서를 관에 제출했다. 이혼 사유는 남편에게서 성적 만족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내용은 39건의 민원 사례를 모아 만들어진 민원문서 사례집에 실려 있다. 그는 20세가 되던 해에 건장하고 평범한 남성과 혼인했다. 그런데 성생활이 문제였다. 남편은 성생활에 대한 이해도 충분하고 건강에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아내와의 성관계에 소극적이고 성적 만족감을 주는 데는 매우 부족했다. 이 여성은 부부생활이 너무 힘들고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으며 우울했다. 이혼을 결심하고는 부부의 성적 취향과 성관계에 임하는 남편의 태도 및 부족한 능력 등을 상세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남편에 대한 애정은 있지만 부부생활에 무익한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은 문제가 있으므로 이혼이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원정소지를 마무리 짓는다.
신태영이 부당한 이혼 요구에 치밀한 논리로 자신을 지켰다면 ‘박명첩원정소지’에 등장하는 여성은 부부 사이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체적으로 행사하는 당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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