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송환법 반대시위’의 함의
일국양제 침해 우려가 부른 시위, 그 이면엔 덩샤오핑이 우려했던
英이 홍콩에 남긴 ‘독약’ 있어… ‘민주개혁’으로 발현된 피플파워
송환법이 뇌관되어 약발 발휘… 시진핑의 조급한 리더십에 경종
최근 홍콩 시위에는 홍콩 전체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참가했다. 민주주의가 행해지는 특정 국가와 지역의 인구 기준으로 시위 참가자 비율로만 보면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16일 벌어진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에 반대하는 시위에는 200만 명 이상이 참가했는데 이는 전체 인구(745만 명·2018년)의 26.8%에 이른다. 반환 22주년을 맞는 7월 1일에는 300만 명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송환법에 대한 강한 저항은 반체제 인사나 민주활동가뿐 아니라 중국의 눈에 벗어나는 누구라도 정당한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중국으로 보내져 조사받거나 재판받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가장 크다. 하지만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가 노도(怒濤)처럼 분출되는 이 광경을 이런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송환법 파동은 무엇보다 법안이 가진 ‘일국양제(一國兩制·1국가 2체제)’ 침해 가능성이 가장 큰 요인이다. 홍콩에 일국양제를 구상한 것은 덩샤오핑으로 알려졌지만 그 전에 저우언라이의 ‘홍콩 보석론’도 있다. 국민당의 장제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 홍콩을 무력으로라도 되찾겠다고 했지만 공산당의 저우언라이는 ‘보석은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영국이 홍콩을 돌려주기 전에 홍콩에 몇 가지 ‘독약’을 남겨둘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영국인들이 이권을 차지하는 대규모 사업을 벌여 반환 후 홍콩 정부의 재정을 거덜 내는 것도 한 종류로 봤다. 이와 관련해 미국 하버드대 에즈라 보걸 명예교수는 덩샤오핑도 전혀 예견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바로 ‘민주개혁’으로 반환 후 중국 정부의 홍콩에 대한 장악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분석했다.(‘덩샤오핑 평전’)
홍콩에서 민의 대변 기관인 입법국(반환 후 입법회) 의원 중 일부가 시민에 의해 처음 선출된 것은 반환 6년 전인 1991년이었다. 마지막 총독 크리스 패튼(1992년 4월∼1997년 6월 재임)은 투표권 및 민선 의원 확대 등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보걸 교수의 분석대로라면 이번 홍콩 피플파워는 영국이 남긴 ‘독약’이 시진핑 주석의 강권과 만나면서 제대로 약발을 발휘하고 있는 형국이다.
○ ‘홍콩인에 의한 홍콩통치’ 무력화 가능성 제기
홍콩 당국은 미국 영국 등 20여 개 국가와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고 있다. 인도 대상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37건의 심각한 형사범죄 용의자다. 하지만 송환 대상 국가에 중국이 포함되고 입법원의 동의 없이 줄곧 친중파인 행정장관의 결정만으로 범죄인 인도가 가능하게 되면 홍콩 사법 체제의 독립성은 무너질 수 있다는 게 시민들의 우려다.
1997년 홍콩이 반환된 뒤 헌법 격인 ‘홍콩 기본법’은 반환 후 50년 동안 국방과 외교 외에는 ‘고도의 자치’, 즉 항인항치(港人港治·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를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2015년 중국 지도부에 비판적인 책을 팔아온 홍콩섬의 ‘퉁뤄완(銅(나,라)灣)’ 서점 관계자 5명이 선전과 태국 파타야 등에서 중국으로 납치 및 연행됐다. 이들은 소식도 끊긴 채 최소 6개월 이상 조사를 받았고 한 명은 아직도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다.
홍콩 정부가 송환법을 추진한 경위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2월 대만에서 20세 홍콩 남성이 밸런타인데이 여행을 함께 떠났던 동갑 여성을 살해하고 홍콩으로 도피하자 이 남성을 대만으로 보내 처벌하자는 것이 송환법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론 중국이 오래전부터 홍콩에서 중국에 비판적인 활동을 하거나 대륙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한 인물을 합법적으로 연행해 조사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다 대만 살해 사건을 좋은 명분으로 삼았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 “홍콩 독립” 등 레드라인 넘는 구호 등장
송환법이 뇌관이 되어 폭발한 홍콩 시민들의 불만은 시진핑 정부 들어 통제가 강화되고, 홍콩 정부도 민심에 귀를 닫는 일이 잦아진 결과물이다.
후진타오 주석 시절인 2003년과 2012년 국가안전법과 중국 본토식 국민교육 과목 도입 추진에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나자 모두 유보 혹은 보류됐지만 시 주석 집권 이후는 달랐다. 2014년 홍콩 행정수반 완전직선제를 요구한 ‘우산혁명’ 시위는 79일 만에 강경 진압됐다. 이어 반체제 서점 관계자 납치 연행 사건, 중국 국가 모욕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국가법(國歌法) 시행, 독립 성향 야당 후보의 입법원 피선거권 박탈 등도 이뤄졌다.
2016년 2월 중화권 최대 명절인 춘제(설날)에 경찰이 어묵 등을 파는 전통 노점상을 단속하면서 촉발된 시위에서는 ‘홍콩의 독립’ ‘반공(反共)’ 같은 ‘레드라인(허용 한계)’을 넘는 구호까지 등장했고 시위도 과격해졌다.
홍콩의 미래가 흐려질 경우 등장하는 화두가 ‘홍콩 엑소더스’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지난해 이민을 떠난 홍콩인은 2만4300명으로 2012년 이후 가장 많았으며 2016년 6100명에 비해 4배나 늘었다고 보도했다. ‘홍콩 엑소더스’는 반환 전 이미 두 차례 나타났다. 중국과 영국의 반환 협상이 난항을 겪던 1983년과 1989년 6·4톈안먼 사태 직후였다. 이어 반환 직후 캐나다 밴쿠버로의 이주 등 ‘미니 엑소더스’가 나타난 데 이어 송환법 파동으로 다시 한 번 엑소더스 우려를 던지고 있다.
홍콩 시민이 차라리 홍콩을 떠나자고 하는 데는 반환 이후 가속화하는 중국화에 대한 거부감도 작용하고 있다. 이미 홍콩에는 반환 이후 본토에서 넘어온 주민이 100만 명이 넘어 비중이 13%를 웃돈다. 과거에는 저임금 근로자들이 목숨을 걸고 일자리를 찾아왔지만 반환 후 건너온 대륙 사람들은 보다 나은 교육 의료 등을 찾아온 부유층으로 집값을 앙등시키고 상대적 박탈감까지 느끼게 한다.
○ 시진핑, G20회의서 궁지에 몰릴지 관심
시 주석은 집권 2기를 맞아 국가주석 연임 제한을 폐지하는 헌법 개정을 단행하는 등 국내적으로는 ‘시황제’ 권력을 휘두르고 있지만 홍콩이라는 큰 돌부리를 만났다. 한 전문가는 “시위 파고가 높아져 시 주석의 지도력이 크게 손상을 입었지만 6·4톈안먼 사태 같은 유혈 진압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 딜레마”라고 말했다. 당장 일본 오사카에서 28, 29일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홍콩 시위로 어떤 견제구를 당할지 관심이다.
홍콩 송환법 시위가 반환 이후 최대 규모로 커진 데는 미중이 패권 전쟁기에 들어가고 있다는 시대적 상황을 떼어 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입법회에서 송환법 제정을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2월부터다. 그런데 6월 들어 시위가 본격화한 것은 미중 갈등이 무역, 기술, 남중국해 등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는 기류를 타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대만과 함께 시위 지지 등을 명분으로 홍콩 카드도 사용할 의도를 내비치고 있다.
홍콩 시위는 단일 지도부가 있어 의도적으로 시위를 주도하고 방향을 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중국화가 가속화하는 홍콩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미중 패권 전쟁 시기를 타 중국에 대한 저항을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섣부르게 송환법을 통해 홍콩을 장악하려 한 시진핑의 선택은 홍콩 시민의 저항이 미중 갈등 구도 속으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더욱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반환 후 일국양제하 50년 고도의 자치’를 보장한 홍콩기본법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홍색으로 물들이려는 것에 대한 홍콩인들의 저항이 송환법 반대로 표출됐다. 시 주석이 대륙에서 권력을 강화한 자신감으로 홍콩을 제압하려다 ‘악수(惡手)’를 두었으며 그 역풍을 세게 맞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이끌 지도자답지 못한 조급함은 시 주석의 리더십이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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