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비록 적이지만 120분 동안 사투를 벌인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이었을까. 이운재는 승자의 환호도 접은 채 골대 왼쪽으로 조용히 걸어나갔고 그제서야 넘치는 기쁨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다는 듯 관중을 향해 ‘씨익’ 웃음을 흘렸다.
4-3으로 한골을 앞선 상황. 서두를 것 없는 상황에서 한국의 마지막 키커로 ‘백전노장’ 홍명보가 나섰다. 관중석에서는 환호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홍명보는 이런 관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오른쪽 상단을 향해 공은 정확하게 날아갔고 허공을 가른 공은 경쾌하게 골네트를 가르며 무적함대를 완전히 침몰시켰다.
첫 번째 키커로 나선 황선홍의 슛이 골대 왼쪽으로 몸을 날린 스페인 골키퍼 이케르 카시야스의 옆구리쪽을 뚫으며 가까스로 통과했을 때만 해도 한국 벤치는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이어 키커로 나선 박지성과 설기현의 슈팅이 모두 골네트를 가르자 스페인은 쫓기는 입장이 됐다. 3-3. 한국의 네번째 키커로 나선 안정환마저 깨끗한 득점으로 이탈리아전 페널티킥 실축의 불명예를 날려버리자 스페인을 짓누른 압박감은 최고조에 달했고 이런 분위기는 결국 호아킨 산체스의 실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승부차기 전 연장전을 포함한 120분간의 경기도 숨막히는 접전이었다.
경기 초반 주도권은 한국이 쥐었다. 전반 10분경 박지성과 김남일의 예리한 스루패스에 스페인 주장 페르난도 이에로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반 25분 프란시스코 데페드로의 프리킥은 한국 수비벽에 막혔고 28분 페르난도 모리엔테스의 머리를 맞힌 프리킥은 이운재의 신들린 선방에 무산됐다.
그러나 스페인의 공세는 매서웠다. 31분 데페드로의 코너킥에 이은 이에로의 헤딩슛이 크로스바를 살짝 넘겼고 42분 호아킨 산체스의 오른쪽 측면 돌파에 이은 센터링은 이운재의 손을 살짝 벗어나며 결정적인 찬스로 이어졌다. 전반 종료 직전 인저리타임 때도 데페드로, 이에로의 위협적인 슈팅이 골문을 살짝 벗어났다. 전반 슈팅수 6 대 1로 스페인의 압도적 우위. 4만여 홈팬은 숨을 죽인 채 함성조차 지르지 못했다.
스페인은 후반 들어서도 모리엔테스와 산체스의 위협적인 슈팅을 시작으로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마침내 전반 부상한 김남일 대신 이을용을 투입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은 두 번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지친 유상철 대신 이천수를 투입하면서 박지성을 미드필더로, 이천수를 오른쪽 날개로 자리바꿈한 것.
수혈은 성공적이었다. 박지성과 이천수의 활발한 오버래핑으로 오른쪽 측면 공격의 물꼬를 튼 한국은 후반 22분 코너킥을 얻어냈고 이어 송종국의 센터링은 이천수 박지성의 위협적인 슈팅으로 이어지며 상대의 혼을 뺐다.
한국은 이후 눈에 띄게 발이 느려진 스페인과 다시 팽팽한 접전을 이어나갔고 히딩크 감독은 후반 종료 직전 수비수 김태영 대신 공격수 황선홍을 투입하는 강수로 연장전까지 팽팽한 접전을 이어갔다.
광주〓김상호기자 hyangsan@donga.com
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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