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조디 포스터’. 추상미(28)를 보면 왠지 그런 느낌이 든다. 약간 치켜올라간 눈꼬리, 촉촉한 눈망울… 전체적인 얼굴보다는 강렬한 눈매가 먼저 눈에 뜨이는 그. 언뜻 차가운 인상이지만 얘기를 나눠보면 ‘참 속이 깊은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공적인 자리든 사적인 자리든 추상미는 좀처럼 말실수 하는 법이 없다.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고 가급적 말을 아끼는 스타일이다. 수년전부터 그를 보아왔지만 그에게서 단 한 번도 남의 험담을 들어본 적이 없다. 대신 남의 장점은 많이 늘어놓는 ‘예쁜’ 사람이다.
추상미는 밖으로 드러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일이 없을 땐 집에서 책이나 비디오를 보고 음악을 듣고 가끔 엄마와 영화를 보러 다니는 것이 전부다.
혈액형은 A형. 그는 예나 지금이나 흔히 말하는 전형적인 A형 스타일을 좋아한다. 표현을 자제하고 내면에 담아두었다가 한 번 쏟아내면 아주 열정적인 사람, 때론 걷잡을 수 없는 광기를 보이는 열정이 끓어오르는 그런 사람들… .
그는 재작년 대박을 터뜨린 영화 <퇴마록> 이후 몇편의 TV 드라마를 제외하고 한동안 활동이 뜸했다.
“요즘에 일부러 공백기를 가졌어요. TV출연을 하다보니까 자꾸 소모적이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뭔가 채워지지는 않으면서 내 안의 것이 계속 빠져나가는 것 같고…. 제가 관심을 두었던 분야는 영화였는데 영화하고 자꾸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원래 제 꿈이 시나리오를 쓰는 거였거든요. 예전부터 제가 쓴 시나리오를 제가 직접 연기해보고 싶었어요. 쉬는 동안 좋은 시간 많이 보냈어요. 글을 끄적거려보기도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그동안 저를 가꾸는데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아요.”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대신 MBC 라디오 심야프로를 맡으면서 목소리는 꾸준히 선보였다. 밤 12시부터 2시까지 진행되는 <추상미의 오늘 같은 밤>은 벌써 6개월간 전파를 탔다.
“시간대가 늦은 생방송이라 좀 힘들어요. 저로선 개인적으로 그 때가 뭔가를 가장 많이 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또 일단 낮밤이 바뀌니까 남들과 시간맞추기도 힘들고, 또 하다보니까 이것도 단순노동처럼 되는 거예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을 하다보니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게 돼요. 그래도 재미는 있어요.”
그러나 그 스트레스와 재미도 더 이상 ‘맛볼 수’는 없을 것 같다. <퇴마록> 이후 3년만에 스크린 나들이를 하기 때문이다.
공백기 동안 오히려 시나리오는 더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하고 싶다는 욕심이 드는 작품은 없었다. 행여 그런 시나리오가 생기면 불행히도 영화사가 엎어졌다. 이래저래 영화와 끈이 닿지 않던 차에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생겼다.
▼그의 연기변신…"소원대로 볼품없고 무식한 여자가 됐어요”▼
그는 올 가을에 <세이 예스> 크랭크 인 예정이다. 이 영화는 여행중인 두 남녀가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집요하게 추적당하면서 펼쳐지는 공포 스릴러물. 정체 불명의 남자 역엔 박중훈이 캐스팅됐고 추상미는 그의 끈질긴 접근에 정면으로 맞서는 여자 역을 맡았다. 그러나 추상미의 남편 역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영화 촬영이 대부분 강릉에서 이뤄져 추상미는 할 수 없이 생방송인 <오늘 같은 밤>을 놓을 수밖에 없다.
특별히 다른 변화 없이 세사람을 중심으로 쫓고 쫓기는 장면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즐거운 여행길이 갈수록 공포의 길로 변해가는 것을 표현하자면 아무래도 연기자의 내면 연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시나리오에 대사는 있지만 배우의 성격은 드러나 있지 않다.
“성격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것은 무궁무진하죠. 청순하게 표현하느냐 아니면 지적이고 당당한 캐릭터로 가느냐 하는 건 제가 하기 나름이에요. 퇴마록에서의 제 이미지가 워낙 강한데다 스릴러물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이번에도 강한 성격이 아닌가 하는데 음~ 아니에요. 악한으로부터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순수하고 맑은 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관객들로 하여금 많은 동정과 안타까움을 살 수 있는 주인공이 될 것 같아요.”
추상미는 시나리오를 받았다고 해서 단순히 대사만 달달 외우지는 않는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주인공의 성격. 그것 때문에 항상 고민을 많이 한다. 때문에 그는 주변 사람들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 그 안에서 힌트를 얻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동안 비교적 강한 캐릭터를 보여왔던 그는 내심 변신을 꿈꾸고 싶어 한다. 그는 쉬는 동안 CF를 통해 나름대로 변신을 꾀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의 변신은 파격적이었다. 잘 나가는 여배우들이 옷을 벗는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건만 그는 과감하게 벗어던졌다.
“제 이미지가 너무 딱딱하게 보여왔기에 저도 다른 면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지금은 조선시대도 아니고 여자들이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게 죄도 아닌데 그렇게 움츠러들 필요는 없다고 봐요. 더구나 이게 무슨 에로영화도 아니고 화장품 광고였고 또 스태프들이 믿을 만했기에 천박하게 나오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 한 번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다행히 반응이 좋았죠. 그런데 벗었는데도 섹시하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연기에 있어서도 그가 생각하는 변신의 매개체는 결코 부드럽고 우아한 여자가 아니다. 그는 볼품없고 무식한 여자가 돼보고 싶다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자신의 ‘소원’대로 추상미는 배운 것 하나 없이 오로지 물질만 해대는 제주 해녀역을 맡게 됐다
8월 2일 방송될 KBS 2TV 단막극 <숨비소리>가 그것. ‘숨비소리’란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바다 위로 올라와 가쁜 숨을 내뱉을 때 내는 소리다. 수중 촬영이 많은 드라마 특성상 추상미는 열흘간 수영장에서 하루 2시간씩 스킨스쿠버 연습을 했다. 그러나 그는 7월 중순 울릉도에서 수중 장면을 찍다가 죽을 뻔했다.
“바닷속에 들어갔다가 사고가 나서 상대역인 최재성씨가 구해주는 장면이었죠. 딱호흡이라고 해서 최재성씨가 자기의 산소호흡기를 저한테 물려주었다가 자신이 물곤 하는 게 반복되는 거였는데… 그냥 해도 힘든 판에 연기까지 겸하다보니 제가 호흡을 제대로 못했는데 호흡기를 가져가는 거예요. 그때부터 호흡이 서로 어긋나기 시작한 거죠. 숨이 막혀서 나중에는 호흡기를 뺏어들면서 발버둥치고 있는데 카메라맨들은 그게 실제상황인걸 모르고 연기인 줄 알고 그대로 촬영하는 거예요. 그때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물먹고 죽을 뻔한 경험을 했다면 선뜻 바다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그는 응급조치 후 바로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연거푸 들어가 그날의 분량을 말끔하게 다 찍었다. 그런 그를 보고 주변에선 혀를 내두르며 독한 여자라고들 했다.
▼그가 가꾸는 아름다움…“틈만 나면 러닝머신과 미니 역도로 탄력을 줘요”▼
추상미는 여자든 남자든 일단 아름답게 보이는 게 좋다는 생각이다. 물론 일을 할 때 작품의 성격상 <뽕네프의 연인들>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여자 역을 맡았다면 1주일이고 씻지 않을 용의가 있지만 평상시엔 최대한 아름답고 깔끔한 모습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게 늘상 공들여서 꾸미고 다닌다는 얘기는 아니다. 편안한 캐주얼 옷차림일지언정 항상 정돈돼 있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
그는 언제나 끊임없이 운동을 한다. 러닝머신을 이용해 시간만 나면 뛴다. 미니 역도로 탄력을 주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여성들이 즐겨 하는 얼굴 마사지 대신 고문이다 싶을 정도로 아픈 경락마사지도 꾸준히 받는다.
“저같은 경우는 고무줄 살이에요. 특히 얼굴은 더해요. 조금만 먹어도 금방 부어오르고 조금만 굶으면 확 줄어들어요. 그게 너무 차이가 심해서 관리를 잘 해줘야 해요. 헬스같은 운동은 꾸준히 해줘야 해요. 하다가 그만두면 정말 안하느니만 못하거든요.”
그는 외형적인 면보다는 내면적인 자기가꾸기를 더 중요시한다. 예전에는 감정조절을 잘 못하는 편이었다. 그저 내키는대로 내버려두는 스타일이었기에 요즘에는 그걸 조절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이다.
“제 성격이 아주 급했어요. 특히 일하는 현장에선 마음이 더 급해져요. 일종의 조바심이랄까? 잘해야겠다는 욕심이 너무 많다보니까 연기하는 것도 급해지고… 그것 때문에 내심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죠. 그런데 지금은 거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 같아요.”
사람을 만나도 항상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점점 많이 들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챙겨주는 편이에요. 조그만 것이라도 남한테 베푸니까 기분이 좋아지네요.”
▼그가 그리는 미래…“아주 작은 극장 지어 아빠의 작품을 무대에 올릴 거예요”▼
“이런 걸 벌써 밝혀도 되나?” 하면서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일들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우선 그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이촌동의 보금자리를 8월중에 옮길 예정이다. 현재 그는 홍대 근처에 3층짜리 건물을 짓고 있다. 건물 지하엔 소극장이 만들어져가고 있다.
“아주 작은 극장이에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부터 엄마의 소원은 15주기가 되는 해에 뭔가를 하자는 거였어요. 올해가 15주기예요. 엄마의 소원을 꼭 들어드리고 싶었어요. 무리하는 감이 없진 않지만 소극장을 만들어 개관기념 겸 추모공연으로 아버지의 트레이드 마크 작품인 <빨간 피터의 고백>을 무대에 올릴 거예요.”
소극장은 작은 오빠인 추상록씨가 맡아 운영할 거라고 했다. 중앙대에서 연극을 전공한 상록씨는 뉴욕에서 유학한 후 ‘씨네 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일 예정이다. 씨네 록은 영화와 라이브 콘서트가 합쳐진 장르.
그의 계획은 거기에서 끝나질 않았다. 1층과 2층은 갤러리 카페를 만들 생각이다. 카페 안에 미술작품을 전시하여 파는 구상도 갖고 있다. 그러나 고급스런 갤러리 카페풍은 아니다. 가까이에 있는 홍대 미대생들의 아마추어 작품을 전시할 예정이다.
“저도 홍대를 졸업했지만 가끔 홍대 미대생들의 전시회에 가보면 ‘이거 팔면 안되나’ 싶을 정도로 갖고 싶은 게 참 많았어요. 홍대 미대에 열 개가 넘는 학과가 있는데 그들의 참신한 개성을 살린 작품을 전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림만이 아니죠. 예를 들어 의상디자인학과 학생들의 개성있는 옷들, 금속공예과의 액세서리, 도예과의 도자기, 가구디자인학과의 소품…. 학생들중에는 가난한 학생들도 있고 또 워낙 돈이 많이 드니까 그런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해주면서 잘되면 서로 좋잖아요.”
추상미는 여러 가지 의미를 둔 복합적인 건물에 ‘카페 떼아뜨르 추’ 라는 이름을 붙였다. ‘테아트르 추’는 아버지 추송웅씨가 생전에 명동에서 운영하던 소극장 이름이기도 하다.
스물여덟의 추상미. 그는 이제 더 이상 아버지 추송웅씨의 후광을 입은 ‘빨간 피터의 딸’이 아닌 추상미로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그에게 아버지의 이름이 부담스럽지 않으냐는 질문도 끊임없이 해왔다. 그러나 그는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는 자신이 뛰어넘어야 할 존재가 아닌,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계신 분이기에 지금도 여전히 ‘빨간 피터의 딸’을 고집하고 있는 사랑스런 딸이었다.
<여성동아> ●글·최미선 기자 ●사진·조영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