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도 형도 없는 집. 어린 동생들은 두려움에 떨다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잠을 청했다. 참고 견뎌야만 형이 잘되는 거라고 믿었다. 부모님은 “장남을 기죽게 할 수는 없다”며 전국의 축구장을 따라 다녔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장남의 축구 뒷바라지만큼은 소홀함이 없었다. 형은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동생들의 얘기를 듣고 가슴이 아팠지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축구 명문교인 풍생중-대신고-한양대에서 주전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그 형을 프로축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어느 구단도 지명하지 않았다.
▷“정말 충격이었죠. 그래도 축구를 그만둘 생각은 못했어요. 저만 믿고 있던 부모님과 동생들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조차 사치였으니까요.”
실의에 빠져 있던 주민규(25)에게 K리그 챌린지(2부 리그) 고양의 이영무 감독(62)이 손을 내밀었다. 2013년 ‘폼 나는 프로 선수’가 아닌 ‘추가 번외’(연습생) 선수로 고양에 입단한 주민규는 달라졌다. “이전까지 내 자신을 너무 믿었던 것 같아요. 후회하고 반성했습니다. 감독님과 형들에게 많이 배운 덕분에 훈련 자세는 물론이고 성격까지 바뀐 것 같아요. 고양에서의 2년은 힘들면서 가장 보람 있는 시간이었죠.” 주민규는 지난 시즌을 마친 뒤 신생팀 이랜드로 옮겼다.
▷올해 주민규의 활약은 발군(拔群)이다. 11일 현재 22경기에 출전해서 17골 3도움으로 득점과 공격포인트 선두를 질주하고 있다. 대학 시절 미드필더였던 그를 공격수로 탈바꿈시킨 이영무 감독은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템포를 조절한다”고 말했다. 이랜드의 마틴 레니 감독은 “환상적인 골 결정력을 가졌다”고 칭찬했다. 놀라기는 주민규도 마찬가지다.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팀을 잘 만난 덕분인 것 같아요. (조)원희 형과 (김)재성이 형 같은 선배들부터 후배들까지 모두 열심히 뛰며 기회를 만들어 준 덕분이죠.”
▷주민규는 지난달 10일 동아시안컵 대표팀 예비 명단 50명에 포함됐다. 7일 뒤에는 K리그 올스타전에 ‘팀 최강희’ 멤버로 출전해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골까지 터뜨렸다. 그가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지난달 21일 확정된 23명의 최종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아쉽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올스타전 이후 매스컴에서 많이 띄워 줬어요. 솔직히 최종 명단 발표 전날에는 마음이 두근거렸죠. 그래도 크게 실망은 안 했어요. 잘하는 선수가 워낙 많으니까요. 예비 명단에 들어간 것만 해도 감사해야죠.”
▷주민규에게는 태극마크 못지않은 간절한 소원이 또 하나 있다. 팀이 클래식으로 승격해 ‘1부 리그 선수’가 되는 것이다. 개인 기록에 대한 목표도 생겼다. 지난해 아드리아노(서울)가 세운 챌린지 한 시즌 최다골(27골)을 넘어서는 것. 시즌 개막 전 목표였던 10골을 일찌감치 넘어선 뒤 각오를 다지기 위해 목표를 높게 잡았다. 주민규는 지금보다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 클래식 무대를 밟기 위해,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애쓴 가족들을 위해…. “동생들 결혼 비용은 꼭 도와주고 싶다”는 주민규가 K리그에서 또 하나의 ‘연습생 신화’를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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