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환이 공동 취재구역에서 한국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다 보인 눈물 때문이었다. 막 끝난 수영 자유형 400m에서 박태환은 2위를 했다. 미국 기자는 “군대 때문이냐”고 했다. 은메달은 병역면제 혜택을 받지 못해 그러냐는 것이다. 어디서 주워듣긴 했는데 대충 들은 모양이다. 올림픽에선 동메달을 따도 병역이 면제된다. 게다가 박태환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이미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필자는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다”고 했다. 한국 기자들을 비집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지 미국 기자는 자기 나라 선수 쪽으로 되돌아갔다. 동메달을 딴 미국의 피터 밴더케이가 박태환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며칠 뒤, 이번에는 역도의 장미란이 공동 취재구역에서 한참을 운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 “베이징 올림픽 때 기록에 한참 못 미쳤다. 나를 응원한 분들을 실망시킨 것 같아 걱정스럽다.” 베이징에서 금메달을 딴 장미란은 런던에서 4등을 했다. 또 며칠 후, 은메달을 딴 태권도의 이대훈은 “응원해 준 국민들에게 화끈한 경기를 보여주지 못해 죄송하다. 2등이라 속상하다”고 했다. 현지 응원을 왔던 이대훈의 아버지는 “부모로서는 만족한다”면서도 “기대해 주신 국민들께 죄송하다”고 말했다.
종목을 각자가 정할 수 있다고 하자. 꼭 운동 경기일 필요는 없다. 각자 제일 잘할 것 같은 종목이면 된다. 인터넷 게임도 괜찮고, 눈(目)싸움이나 휘파람 크게 불기도 된다. 밥 빨리 먹기도 좋고, 하다못해 고스톱이나 딱지치기라도 상관없다. 뭐든 다 된다. 이렇게 정한 종목에서 국가대표를 뽑는다면…. 아무리 생각을 굴려도 국가대표로 뽑힐 만한 종목이 필자에게는 없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나는 ○○” 하고 자신 있게 대는 경우를 거의 못 봤다. 그러니 올림픽 국가대표로 뽑히기는 얼마나 어렵겠나. 국가대표라고 해서 올림픽에 다 나가는 건 아니다. 수영이나 육상 같은 기록 종목은 올림픽 기준기록 안에 들어야 된다. 구기 종목은 대륙 예선을 통과해야 한다.
축구만 놓고 보자. 우리나라에 중학생 선수가 1만1600명쯤 된다. 이 중 절반이 안 되는 5600명 정도가 고등학교 때까지 축구를 한다. 이 가운데 또 절반에 못 미치는 2700명가량만 경쟁에서 살아남아 대학에서도 공을 찬다. 고교와 대학을 합쳐 국내 프로축구 1부 리그에 입성하는 선수는 1년에 많아야 70명 안팎이다. 국내 프로축구 1부 리그 선수는 400명 남짓이다. 여기서(해외파 포함) 또 가리고 가려 뽑은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단다.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다.
이렇게 뽑은 국가대표인데 올림픽 성적이 성에 좀 안 찬다고 전국의 축구장을 물로 다 채우자는 얘기를 해버린다. 베이징 올림픽 때 남자 축구가 8강에 가지 못하자 비아냥대는 댓글이 인터넷에 차고 넘쳤다. “축구장에 물 채워라, 박태환이 수영하게.” “축구 골대 확 좁혀라, 우생순(핸드볼 여자 국가대표팀)이 연습하게.” 인정사정 안 봐주고 한 방에 보내버린다. 이러니 세계 4위를 하고도 눈물이 날 수밖에…. 국민의 기대가 금메달이었으니 세계 2위의 성적을 냈어도 죄송하다 할 수밖에….
국내 프로배구에서 뛰는 용병 중에 그로저(삼성화재)란 선수가 있다. 현역 독일 국가대표다. 그의 종아리엔 올림픽 오륜기와 함께 ‘2012 LONDON’이라 새긴 문신이 있다. 필자는 문신을 보고 그로저가 런던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독일은 런던 올림픽에서 5위를 했다고 한다. 그로저는 아버지, 어머니, 고모가 배구 선수 출신이다. 형, 남동생, 여동생도 배구를 했다. 아버지와 고모는 헝가리 국가대표를 지냈다. 남동생도 독일 국가대표 출신이다. 하지만 그로저는 “가족 중 올림피언(올림픽 출전자)은 나뿐”이란 걸 강조한다. 런던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문신을 새긴 그로저는 올림픽 출전을 인생 최고의 경험으로 꼽는다. 독일에선 올림피언을 보면 길 가던 사람들이 엄지를 세워 보인다고 한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선수여도 올림피언이라고 하면 사진을 같이 찍고 싶어 한다. 올해 또 올림픽이 열린다. 올림픽은 출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 올림피언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죄송해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만큼 대단한 성원은 없다. 올림피언이 곧 챔피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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