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기자의 스포츠 한 장면]페이스메이커도 가끔은 완주를 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23일 03시 00분


영화 ‘페이스메이커’에서 페이스메이커로 나선 주만호(김명민 분·왼쪽)가 마라톤 레이스 도중 한국 마라톤 1인자 민윤기(최태준 분)에게 마실 것을 건네고 있다.
영화 ‘페이스메이커’에서 페이스메이커로 나선 주만호(김명민 분·왼쪽)가 마라톤 레이스 도중 한국 마라톤 1인자 민윤기(최태준 분)에게 마실 것을 건네고 있다.
이종석 기자
이종석 기자
 “허구한 날 남 잘되라고 뛰는 것 지겹지도 않냐?”

 동생이 못마땅한 투로 형에게 이렇게 묻는다. 외무고시에 합격해 공직 생활을 하는 동생은 집안의 자랑이다. 형은 전성기가 지나 한물간 마라토너다. 영화 ‘페이스메이커’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2012년 개봉한 이 영화는 배우 김명민이 주인공 주만호(형) 역을 맡았는데 주만호는 마라톤 페이스메이커(pacemaker)다.

 페이스메이커는 풀코스(42.195km) 완주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대회 주최 측이 정한 목표 기록 달성을 위해 일정한 페이스로 특정 지점까지 선두권을 끌어주는 게 페이스메이커의 임무다. 대회에 따라선 특정 선수의 우승을 돕기 위해 속도를 조절해 가며 조금 앞서 뛰어주는 경우도 있다. 영화에서 마라톤 국가대표 감독으로 등장하는 배우 안성기가 올림픽 금메달을 노리는 선수에게 “초·중반 페이스가 제 기분대로 들쭉날쭉하는 게 무슨 마라톤 선수라고…. 지금 너한테 절실하게 필요한 건 빠르고 정확한 전문 페이스메이커야”라고 말하는 장면이 그런 경우다.


 요즘 페이스메이커가 자주 등장한다. 마라톤에서가 아니다. 자칭(自稱) 대권 주자들이 레이스를 준비 중인 정치판에서다. 그런데 대개가 타칭(他稱) 페이스메이커다. “페이스메이커는 초반엔 무리해서 1등으로 달리지만 결국 다른 선수의 우승을 위해 뛰는 선수다. 그런 면에서 보면 페이스메이커는 (내가 아니라)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나는 마지막에 1등을 할 것이다.”(안희정 충남도지사)

 “내가 문 전 대표의 페이스메이커를 하기로 약속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럴 생각이 없다. 포기는 없다. 나는 완주할 것이고 끝내 이길 것이다.”(이재명 성남시장)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대권 주자가 아닌 어느 정치인한테서 ‘친박의 페이스메이커’라는 소리를 들었다. 영화 속 동생이 허구한 날 남을 위해 뛰는 형을 못마땅해했듯, 페이스메이커로 지목되는 걸 다들 마뜩잖아한다.

  ‘내가 왜 페이스메이커야!’

 대권 주자들이야 이렇게 버럭 화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실제 마라톤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이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마추어든 프로 선수든 누군가를 이끌고 빠르면서도 일정한 스피드를 유지한 채 30km 가까이 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말 그대로 페이스 조절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세계 수준급의 대회라면 페이스메이커는 25km까지 매 5km를 15분 정도에 맞춰 뛸 수 있어야 한다. 15분에서 벗어나도 대개 ±10초 이내여야 한다. 대회 주최 측이 이 정도 페이스를 요구하고 계약서에도 담기 때문이다. 5km를 15분에 뛰려면 100m를 18초에 끊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간단치 않다.

 이런 만만찮은 조건 때문에 한 대회에 예닐곱 명의 페이스메이커가 나서도 25km 지점까지 임무를 완수하는 선수는 네댓 명뿐이다. 계약사항인 25km 지점까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페이스메이커는 출전수당을 한 푼도 못 챙긴다. 25km까지 뛰는 것을 의무 조항으로 삼은 대회라면 그 이후로 더 뛰고 말고는 페이스메이커 마음이다.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을 계속해도 된다. 25km를 지나서도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면서 30km까지 대회 주최 측이 정한 기준 기록에 계속 맞추면 수당을 덤으로 받는다. 아니면 이때부터 혼자서 냅다 치고 나가 1등으로 들어와 버려도 괜찮다.

 실제 페이스메이커로 참가했다가 1등을 한 마라토너가 있었다. 2006년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지난 거트 타이스(남아프리카공화국)는 페이스메이커였다. 폴 터갓(케냐)이 2003년 베를린 마라톤에서 당시 세계 최고 기록인 2시간4분55초로 우승했을 때 1초 차로 2위를 한 새미 코리르(케냐)도 페이스메이커였다. 페이스메이커를 꼭 초반에 무리해 앞서 달리다 끝까지 완주하지 못하는 마라토너로 볼 필요는 없다. 그냥 페이스 조절자 정도로 여겨도 괜찮다. 그러면 타칭 페이스메이커로 불려도 ‘내가 왜!’ 하면서 열 낼 일도 없지 않겠나. 페이스를 조절해 주고도 힘이 남아돌아 완주까지 하는 페이스메이커가 종종 있다. 반면 지나고 보면 사실은 페이스메이커의 깜냥도 안 되는 인물이었구나 싶은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으로 본다. 페이스메이커 아무나 하나….

 영화 속 주만호는 자신의 마지막 레이스인 올림픽에 페이스메이커로 출전하지만 완주를 한다. 5년 전 개봉 영화이지만 혹시라도 찾아볼 독자를 위해 주만호의 올림픽 순위는 따로 적지 않는다.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마라톤#페이스 메이커#거트 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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