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원자력 산업을 일궈낸 원로 과학자 한필순 한국원자력연구원(원자력연) 고문(사진)이 25일 급성 심근경색에 따른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고인은 우리나라의 핵연료 기술 자립과 독자적인 원전 설계기술 확보에 크게 기여해 국내 원자력계의 ‘대부’로 불려왔다.
고인이 원자력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2년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전신인 한국에너지연구소 대덕공학센터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다. 고인은 ‘핵연료주식회사’(현 한전원자력연료) 사장을 거쳤으며 1984년 원자력연이 대전으로 이전한 뒤 소장을 7년간 지냈다.
핵연료 자립을 하려면 전문 인력 수백 명이 필요했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전문가 3, 4명도 찾기 어려웠다. 고인은 독일과 공동으로 설계 기술을 개발하는 전략을 택하고 30여 명의 정예요원을 독일로 파견했다. 그 결과 1989년 말 최초로 국산 경수로 핵연료를 생산한 데 이어 이듬해 원자로에 첫 장전을 하는 쾌거를 이뤘다.
고인은 핵연료 연구와 동시에 원자로 설계 프로젝트도 동시에 추진했다. 이 분야에서는 미국과 협력을 추진했다. 인력 50명을 미국에 파견하며 ‘필(必) 설계기술 자립’이라고 쓰인 액자를 들고 만세삼창을 했으며 “(기술 획득에) 실패하면 돌아오지 말고 태평양에 빠져 죽자”고 연구진을 독려했다.
이런 노력 끝에 얻은 기술로 ‘한국형 경수로’를 개발해 영광원전 3, 4호기에 적용했다. 이 기술은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와 수출계약을 체결한 모델인 APR1400의 모태가 됐다.
남장수 한국원자력학회 사무총장은 “고인의 리더십과 추진력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원자력 기술 자립은 요원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1933년 평남 강남군에서 출생한 고인은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서울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서울대 졸업 후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물리학 석사, 캘리포니아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 국방과학연구소에 창설 멤버로 들어가 10년 이상 근무했다.
이 시기에 방탄헬멧, 한국형 수류탄 등의 개발에 기여하며 군사과학기술 불모지인 한국에서 무기 개발 체계의 기틀을 닦았다. 1970년대 미국의 한 대학에서 좋은 조건으로 조교수 자리를 제의받았지만 “당신이 꼭 필요하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설득을 듣고 미국행을 포기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기철(작가), 장녀 윤주(주식회사 콩두 대표), 차남 기석 씨(한국화이바AMS 차장) 등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02-2258-5940), 발인은 29일이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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